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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r 22. 2024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글쓰기, 걷기, 사랑은 닮았다.

사람은 기억을 적는 동물이다. 나를 스쳐간 인연, 그냥 두면 지워지고 말 자국, 이런 것들은 기록과 만나 붙들린다.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지난해 김병익 선생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다. 너무 다급하게 아등바등 말고 천천히 음미하며 즐겨야 오래간다는 말씀. 달고 귀한 분부여서 뜨끔해서 멈칫했다.<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문장이다. 한 번 읽고 다시 읽고 그리고 가만히 기록과 만나 붙들리는 자국들을 떠올려 본다.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은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김병익 선생님께서 나에게 해준 말이라도 되는 듯 글로 붙들어 놓을 기억 찾아본다. 그렇게 문장하나가 마음으로 들어오면, 오래도록  머문다.

 건네는 풍경 속에 머무는 일은 즐겁다. 가만히 문장과 시선을 마주 본다. 다시 읽어도 좋은 문장들.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노트에 적어 논다. 길을 걷다 어여쁜 들꽃을 만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었지. 그런 마음으로 글을 본다. 천히 오래 보고 그래서 멀리멀리 기억되도록.

기억은 글이 될수록 선명해진다. 불분명했던 과거가 그림처럼 떠오르거나 그날의 조각난 감정들이 파도처럼 마음 한가운데로 밀려와 쓰다 울고 쓰다 웃고,  되살아나는 기억들 때문에 놀라기도 한다. 퍼즐처럼 맞춰지는 조각들이 완성되면, ' 아 그래서 내가 오래도록 친구들에게 집착했구나'같은 깨달음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일은 과거의 나와 만나는 동안 연스럽게 이뤄진다. 남아 있는 나날 동안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가는 글쓰기를 마음에 담고 꾹꾹 눌러두고 싶다.



천천히 오래 하는 일 중 즐거운 일은 글쓰기 말고도 또 있다. 바로 걷기. 어릴 적엔 어디든 걸어 다녔다. 버스를 타야 할 일은 거의 없었고, 학교든 성당이든 교회든 친구네 집이든 두 발로 걸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해서, 내 발로 어디로든 다닐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세상 좋은 바람이라도 불 때면 점퍼를 슈퍼맨처럼 뒤로 흩날리며 뛰었다. 바람이 좋아 터질 듯한 마음으로 지치도록 뜀박질을 했다. 어쩌면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살짝 품었던 것 같다. 좀머 씨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작았던 나는 언제고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시간은 더 많은 살과 피를 나에게 주었으니 날기는커녕 뛰는 일조차 버거워지고 말았지. 스를 타고 가야 할 만큼 멀었던 고등학교에선 차비도 아낄 겸 마음껏 걸어볼 겸 친구와 집까지 두 시간 가까이 걸어온 적도 여러 번이다. 해야 할 이야기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걸어도 걸어도 줄어들지 않았던 걷기 열망은 우리를 계속 걷게 만들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많은 길을 함께 걸었다. 걸었던 시간만큼 풀어낸 이야기도 어마어마한데, 아직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속사정과 일상은 멈추질 않으니 이 또한 행복이다. '천천히 오래' 함께 걸었던 시간들 덕분에 우리는 '그래서 멀리' 더 멀리 걸을 수 있는 친구로 남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걸을 준비를 하고 있다. 육 년 전부터 착실하게 둘만을 위한 걷기의 날을 고대하면서.


천천히 오래 할 때 가장 좋은 건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청소년기에 한 번쯤 빠진다는 연예인 덕질도 해본 적이 없다. 훅 다가오는 사람에겐 거리를 두었고, 첫사랑이 시작되었을 땐 서두르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자고 해 상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시작해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지는 사랑이나 오랜 시간 천천히 다가와 꽃 피는 사랑에 대한 로망은 아직도 여전하다. 하지만 첫사랑은 삼 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지금의 남편과도 만난 지 오 개월 만에 결혼했으니, 소망하는 일을 현실로 이루려면 기적 같은 우연과 운명, 그리고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마법이 필요구나 했다. 두 아들을 낳고 엄마가 되니 오래도록 천천히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바뀌었다. 나는 아이를 알아가고 아이 나를 알아가며 우리는 천천히 사랑을 그리는 중이다. 때때로 삐뚤어지는 그림을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그려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만나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더 멀리 가는 사랑을 그려내지 않을까? 해서, 나는 천천히 오래 사랑하고 픈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은 행복해졌다.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이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가는 여정이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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