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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Mar 29. 2024

최후의 최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등에 남은 종기 자국.

잘하는 일이 뭘까? 란 생각으로 십수 년을 보냈다.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보고, 하루종일 골똘히 생각해 보고, 몇 날 며칠을 헤매보고, 관심 가는 책들을 찾아보고, 가까운 지인들에게 " 난 뭘 잘하는 것 같아?"라는 시시한 물음 자주 했었다. 그런데도 소용없었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처럼 답답함만 남았을 뿐이다. 잘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 경쟁 가득한 한국 사회에서 먹고사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해서, 언제든 어딜 들어가든 힘들었다. 런데도 용케 살아남아 돈도 벌고, 모으고 가끔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네는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와중에도 잘하는 일 하나쯤 찾아 내야 할 텐데 하는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듯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는 막연한 체증 같은 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런 고민 속에 머물고 있지만, 시간은 지체 없이 흘러갔고, 지금도 흐르는 중이다. 대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같은걸  대신 써 놓은 문장들이  찾아와 줬다. 로 이런 문장들.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최후의 최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려 발버둥 치는 자야말로 진짜 살아 있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없이 나약하고 일평생 엄살만 부리다가 죽는 사람을 '사이비 산 자'라고 했다.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을 쏟아 내고, 부드러운 말만 듣고 싶어 하고, 사실은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핑곗거리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살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참 괜찮은 태도, 박지현, 45페이지>


최후의 최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려 발버둥 치는 자에 멈춰 섰다. 리고 떻게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던 삶의 순간들과 마주했다.

영업 위주의 학습지 일을 할 때는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침 9시 출근해서 그날 목표량을 할당받고 팀원 전체가 전단지를 들고 아파트 단지로 흩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내려 집집마다 전단지를 붙이고 내려오는 그 길에 나는 지금 영업사원인가? 교사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가? 하는 물음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당시 IMF가 터지고 정규직 찾기가 어려웠던 시기에 정규직이라는 타이틀과 180만 원이라는 고정 급여에 혹해  들었갔지만, 결국 빛 좋은 개살구였다. 영업의 압박이 너무 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만두는 신입사원들과 그들이 맡았던 학생들을 강제로 받아야 했던 일,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사비를 들여 가상학생을 입회시켜야 했던 부당함. 수시로 바뀌는 선생님들 때문에 불만이 쌓인 학부모의 민원 제기도 끝이 없었다. 정신없이 발로 뛰고 움직였던 하루하루가 쌓여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등 쪽에 커다란 혹 같은 게 생겼는데 종기인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일하는 중 고름이 터져버렸다. 흘러나온 고름이  주변의 옷을 다 적시고,  축축해진 등에 당황했지남아 있는 수업이 많아 곧장 다음번 집을 방문했다.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휴지를 돌돌 말 등에 난 혹을 꾹 눌러 힘껏 짜냈다. 짜낸 휴지에 노란 고름이 잔뜩 묻어 나왔다. 고름양이 너무 많아 놀랐지만 대충 닦고 나와 수업을 진행했다. 노랗고 빨간 피고름이 뭍은 채로  다음번 그다음번 수업은 이어졌고,  고름 뭍은 옷은 딱딱하게 말라갔다. 



최후의 최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가야 했던 현실을 마주하고 결국엔 그리 했었구나. 잘하는 일 하나 없어도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진짜 삶을 살 수 있다는 문장이 지금껏 살아온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남보다 조금 뒤처지고, 못났더라도 자기 인생을 자기식으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다행스러움까지 챙긴다. 마지막 진액을 짜내서라도 버티고 헤쳐나가야 할 만큼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야겠구나. 그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는 인생이라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와 올케 언니에게 등에 난 종기를 짜달라고 부탁했다. 언니는 있는 힘껏 종기를 짜주었고, 피고름이 밖으로 빠져나오자 호랑이 연고를 발라주었다. 다행히 종기는 잘 아물었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흔적이 남아 있다. 발버둥 쳤던 삶의 증거라도 되듯이. 제법 크고 또렷한 흔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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