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이 있는 일상 Mar 08. 2024

 잃어버린 길 위에 서 있는 인생.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이 나타나는 일.

길을 잃은 적이 있었던가? 맨 처음 자문해 봤을 땐  잃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본성이 겁이 많고 용기가 부족하니 모르는 길로 한 발을 내딛는 경험을 해봤을 리 없다고 여겼다. 해서 나는 얼마 전 로그에  길을 잃고 싶다고 고백했었다. 어른들이 정해 논 길이나,  발자국 선명하게 찍힌 길만 걸으려 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타박하면서 말이다.


허나 총총한 두 눈을 부릅뜨고 읽어야 길을 잃지 않는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를 읽다가  " 을 잃은 적이 있었나?"란 질문이 다시  왔고, 나는 예전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있었어. 그때를 벌써 잊은 거야?'묻는 목소리. 시간은 순식간에  42년 전으로 돌아갔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듯한 옷차림에 덥수룩한 곱슬머리를 가진 일곱 살 여자아이가 길 위에 서 있었다.   손 위엔 막내언니의 장화가 들려 있었고, 언니들 손에 이끌려 가봤던 이층짜리 작은 아파트를 찾으며 거침없이 좌회전을 하고 직진으로 걷다가 다시 우회전을 하는 아이. 여기쯤이면 하얀색 아파트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아 난감한 표정으로 뒤돌아 봤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보지만 출발했던 길은 아니었다. 익은 골목길은 나오지 않고 낯선 대문과 표지판만이 눈에 들어오자  슬슬 겁이  여자아이는  용기 내어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 여기가 서울이에요?"라고 물었다.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낯선 방안이었다, 깜깜한 방안 알록달록 빛을 내는 어항이 보였다. 은 땀에 젖어 있었다. 누군가 덮어준 이불을 치우고 어항가까이 다가갔다.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던가 보지 못했던가. 남이 있는 건 빛뿐이다. " 어쩔 수 없이 보호소로 보내야겠는데" 했던가? 정확하지 않지만 어디론가 나를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그러던 중 기적처럼  사무실 안으로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큰 어머니였다. 일곱 살 생에 최초 그리고 최후의 길 잃기에서 나는 그렇게 구조되었다.


 " 생존의 열쇠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어버린 길 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겠지.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었던 나 역시 그 깨달음으로 구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른이 되고서는 어땠을까? 역시나 길을 잃었었다. 교육하는 일로 밥 벌어먹고 살다가 그 길이 너무 싫어 잠시 웹디자인 일을 했었다. 학원 생활 3개월 직장 생활 6개월을 경험하면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지. 그래서 나는 되돌아왔다. 원래 걸어가던 길로 조금 더 성숙하고 조금 더 온전한 교육자로 말이다.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만나고 헤어지고 싸우고 질투하고, 아껴주고 미워하면서 수 없이 우정의 길을 잃어봤다. 내 인생에 언제고 친구만큼 소중한 건 없었으니까, 그들과 만나는 길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걸었다. 잃어버린 길만큼 단단하게 놓인 우정의 길을 만났으니 감사할 일이다. 독서를 통한 길 잃기는 또 얼마나 빈번했는가? 미로 같은 독서의 길 위해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새로운 책을, 낯선 책을 자꾸만 열어보아야 했지. 그 길 잃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말이다. 잃어버린 적 없다 여겼던 길들이 사실은 잃어버린 길이였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지 않았다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더 오랜 시간을 보냈을 테다.


"사물을 잃는다는 것은 낯익은 것이 사라지는 것이지만,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새롭고 낯선 것을 경험한 후 내 삶으로 돌아오는 길 잃기,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에 둘려 쌓이고, 낯선 방에서 잠들었 어릴 적 나는 한 번의 잃어버림 이후론 다시 길을 잃지 않았다. 내가 걷는 길이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잊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잃어버렸던 길은 원래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길을 찾기  위해서는 수없는 잃어버림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 그러니 지금 길을 잃었다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길을 찾기 위해 잃어버림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니까.

 언제나 길을 잃는 삶을 살고 싶다.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길 잃기라면, always ok!

이전 01화 문장을 만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