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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Mar 10. 2024

어떤 물건은 삶을 바꾼다

물건에 대한 단상

몇 년 전 허리가 아팠던 이후로 의자에 잘 앉지 않는다. 기차를 타고 부산 재판에 다녀오거나 지하철에서 1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일이 가능할 정도로 허리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그럼에도 허리 통증의 아픈 기억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심하는 행동은 책상(의자)에 앉는 것이다. 책상 앞에 앉게 되면 의식적으로 바른 자세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바른 자세는 무너진다. 허리가 안 좋은 사람에게 의자에 앉는 것은 최악이다. 그래서 일도 서서한다.


일은 서서 하지만, 서서 책을 읽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서서 책을 못 읽을 바는 아니지만, 뭐랄까 책 읽는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또 서서 읽다 보니 자꾸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만 읽게 되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은 일단 손에 계속 들고 있기도 어렵지만,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나에게는 독서용 책상이 필요했다. 일반적인 책상은 앉은키가 큰 나의 허리를 아프게 하니까 독서대를 사용할 경우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책의 높이와 내 눈높이가 맞을 정도의 높이를 가진 책상이 필요했다.


업무용 책상과 책꽂이 사이에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작은 간이 테이블을 놓았다. 독서대와 두꺼운/어려운 책과 연필과 종이가 올라갈 정도 크기의 작은 책상. 나는 하루에 1-2시간 정도 그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나는 그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한다. 책상이 주는 행복감과 충일감이 이 정도로 큰 것인지, 정말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 책상이 놓이면서 나의 작은 방 안에 독립적인 작은 공간이 하나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을 하다가 혹은 일을 마치고 나는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그 책상이 만들어 준 공간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그곳에서는 시간도 다르게 흐르는 기분이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물건을 많이 사고, 많이 버린다. 인간은 물건을 끊임없이 만들고, 그 물건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물건을 끊임없이 사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린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는 인간에게 물건은 그야말로 끝없는 지배의 대상일 뿐이고, 기껏해야 삶의 편의성을 높여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또 어떤 경우는 인간이 물건에게 지배를 당하기도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 자신이 만든 물건을 소유하기 위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 물건을 소유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물건은 삶을 바꾼다. 단순히 삶의 편의성을 높여주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을 통해서 생활이, 생각이, 더 나아가 사람 자체가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물건은 지배와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물건에 대해서는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물건은, 마치 사람처럼,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상호 교감을 나누는 대상이다. 나의 작은 책상은, 나에게 비밀의 공간을 만들어 준 그 작은 책상은, 말없이 천천히 나의 삶을 바꾸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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