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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뀨어라운드 Aug 21. 2024

제주도 여행 갔다가 TV 설치한 사연

가는 정 오는 정


그날은 어디를 가지 않고, 숙소에서 쉬기로 한 날이었다. 오전 오후를 아이와 동네 탐방도 하며 놀다가,

오후 느지막이 낮잠 시간을 가졌다. 안 자겠다는 아이를 낮잠 재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아이를 재우고 잠시 쉬고 있는데, ‘쿵쿵’ 하고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가 깰라 조심조심 문을 열어보니, 주인 할머니였다.


“TV를 좀 큰 것에 연결해서 보려는데, 내가 할 줄을 몰라. 시골 할미라 내가 할 줄을 몰라. 애기 아빠가 좀 도와줄 수 있는가?“


순간 마음이 잠시 머뭇 댔다. 아이가 방 안에서 자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깼는데 방 안에 아무도 없으면 무서워서 울어댈 것 같았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의 미안한 얼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깰까 봐 문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를 따라 마당을 지나쳐, 주인집 안채로 발을 들어섰다. 건조기에 빨래 넣느라 오며 가며 슬쩍 집안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발을 들이고 서보니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양 발이 어색했다.


할머니는 나를 안방으로 인도했다. 침대가 있고, 그 맞은편에는 화장대가 있었다. 화장대 주위로 가구와 짐이 가득했고, 바닥에 TV가 놓여 있었다. 다행히 셋탑박스는 이미 끼워져 있어 불이 깜빡인다. 할머니로부터 TV 연결선들을 건네받아서, 셋탑박스에 끼우고 전원 코드를 꼽자 곧 화면이 나왔다.


그러자, 주인 할머니의 기쁨에 찬 미소. 근데 금방 그 미소가 어두워졌다.


“이거 침대에서 TV를 보고 싶은디, 요기다 놓으면 너무 낮아서 어떠케야 할까 몰러? 우짜지?”


옆에 서랍장을 옮겨 드려, 그 위에 TV를 놓아 드렸더니 아주 함박웃음이시다.



“어이구 돼써 돼써~ 너무 고마워 애기 아빠”


저도 생각보다 금방 끝나서 다행입니다 할머니. 해결했다는 안도감으로 재빨리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숙소에 수건이 부족한 게 떠올랐다. 수건 몇 장만 더 받을 수 있냐고 여쭤보자, 집안에 있던 수건 전부를 주실 태세다.


“아유 많이 많이 가져가 원하는 만큼 가져가~”


하시며, 수건 넣은 서랍장을 활짝 열어 주셨다. 수줍게 수건 몇 개를 집어 들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두 번째 숙소에 머무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주인집과 여행객 숙소의 경계가 점차 사라져 갔다.


처음엔 '내가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숙박하는데 이게 뭔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주 현지에 내가 젖어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기억할 만한 기억들


가만 생각해 보면, 두 번째 숙소는 컨디션 자체는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자꾸만 기억할 만한 에피소드들이 생겨났다. 지금 생각해도 풋 하고 미소 짓게 되는 작은 기억들.


본의 아니게도 인간미 넘치는 숙소에서, 나중에도 추억할 만한 기억들을 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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