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숙소로 옮겨온 다음 날이었다.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끝마치는데, 발아래가 축축하다. ‘뭐지?’ 하고 보는데,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설거지 물이 튀었나?’
잠깐 생각해 봤지만, 바닥에 고인 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 일단 다 닦아 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또 다음날, 아침에 보니 싱크대 아래쪽에 물이 또 흥건했다.
원인을 찾기 위해 싱크대 아래 걸레받이를 영차 영차 어렵게 빼내고는, 납작 엎드려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한 때 집 인테리어를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걸레받이를 빼낼 생각도 했다며 스스로를 대견해해 본다.
원흉은 세탁기로 추정됐다. 싱크대로 올라오는 수전의 연결 부위 쪽은 멀쩡했는데, 그 옆에 설치된 드럼 세탁기에서부터 싱크대 앞까지 물이 잔뜩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숙소를 옮기자마자 이런 일이...'
조금 속상한 마음으로 주인 할머니를 찾아갔다. 주인 할머니는 얘기를 듣고는 어쩔 줄 몰라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신다.
“워매 어떠케 어떠케..“
서비스 센터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오늘은 주말이라 며칠 뒤에나 올 수 있다고 했다. 주인 할머니가 미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신다. 앞으로 예상되는 불편함에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죠 뭐." 하고 돌아섰다. 당분간은 주인집 옆에 붙어 있는 세탁실 베란다에서 세탁기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 즈음, 주인 할머니가 내가 묵고 있는 숙소 문을 두드리셨다. 혼자는 아니셨다. 건장한 남성 한분과 함께였다.
‘AS 기사님이 벌써 오셨나?’
그런데 주인 할머니와 남성분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걸 들어보니, AS 기사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인 할머니의 가족이나 친척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관계도 없는 동네 이웃분이셨다. 우리 아이는 아빠와만 놀던 적막한 숙소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니 신이 났다. 동네 이웃분이 싱크대 아래를 살펴보시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시는 사이, 연신 그 주변을 맴돌며, 이게 문제인 것 같느니,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는 둥 참견을 해댔다.
이런 정신 없는 와중에, 동네 이웃분은 손가락 들어가기도 어려운 빡빡한 싱크대 사이에 자리 잡은 드럼 세탁기를 끙끙대며 결국엔 바깥으로 꺼내셨다. 나는 세탁기 꺼내는 것 자체가 AS 기사님이 오지 않으면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될까?' 하면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본인 일도 아닌데, 동네 이웃분이 그리 힘을 들여가면서까지 하실까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동네 이웃분은 마침내 온 힘을 다해 드럼 세탁기를 바깥으로 꺼내셨다. 그러더니 세탁기 뒤의 꼭지와 호스를 열심히 만지신다. 헐거웠던 연결 부위를 꽉꽉 조인 후, 다시 무거운 드럼 세탁기를 싱크대 안으로 영차 밀어 넣으셨다.
'이제 된 건가?'
시험 삼아 세탁기를 살짝 돌려보니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한번 돌려보고 또 같은 증상이 발생하면 그때는 진짜 AS 기사님 오실 때까지 기다려보자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 숙소를 떠나는 날까지 세탁기에서 물이 새는 일은 없었다.
주인 할머니와 동네 이웃 분이 가시는 길을 배웅해 드리는데,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 이곳에선, 이렇게 이웃에게 갑자기 도움을 요청하고, 또 도움을 주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