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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May 17. 2024

덧없음

사라지는 것이기에 더 아름답다

저항 :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소멸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진정한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보다 먼저 변하는 상대의 마음 앞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상대의 변심 앞에 저항했다. 나는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중한 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상실을 감당할 능력도, 각오도 없었기에 소멸하는 것 앞에 저항했다.


절망 : "다 소용없다"


소멸을 인정하는 순간 절망감이 들었다. 물고 빠는 사랑도 결국 끝이 나고야 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썰물처럼 바빠져 나가는 마음을 지켜보면서 내가 막아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수용이기보다는 낙심에 가까웠다. '인생사 덧없구나'라고 말하듯 허무주의적 사고가 일어났다. 행복한 순간조차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인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상실했을 때 큰 낙심이 찾아온다. 간절히 가지고 싶다고 희망했기에 큰 절망감이 찾아온다. 절망감 앞에서 내가 얼마나 삶에 집착했는지, 잘 살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가지려 했는지, 그것을 지배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냉담 :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다"


큰 절망을 겪고 나면 그 실망감이 너무 커서 더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을 잃게 된다. 더는 애쓰고 싶은 마음이 줄어든다. 이는 상실로 인한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기제이다. 기쁜 감정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알기에 기쁨을 충분히 누 수 없게 된다. 그 기쁨은 곧 끝나고 말 테니 말이다. 이것은 결국 삶의 허무를 느끼게 하고 마음을 차갑게 한다.





수용:  "사라질 순간이기에 더 아름답다"


프로이트는 <덧없음>이라는 에세이에서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한 시인과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 시인은 여름날 오솔길을 산책하며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사를 표현하였지만 환희의 기분은 누리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시인이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은 소멸하고 말 것이며 이 여름 또한 결국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그 시인이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곧 사라질 것이기를 알기에,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슬픔을 피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향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을 했다. 환희의 감정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환희를 누리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허무주의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아름다운 것을 잃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기에 애초에 아름다움을 향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마도 젊은 시인은 아름다운 것이 사라지는 슬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 이였던 것 같다. 그 슬픔의 크기를 알기에 다시 그것을 잃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덧없음에 대해 젊은 시인과는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 아닌가! 무상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희소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우선 세상의 자연물과 인간이 만든 창조물들이 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남녀 간의 사랑, 우정, 가족 간의 애정 또한 다르지 않다. 생명이 있는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으며 그 생명들 간의 관계 역시 끝이 있다. 이 유한함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결국 덧없음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지금-여기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사라질 것이기에, 없어질 것이기에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리고 놓아주기


머릿속에 남아 있는 한 순간이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의 기억이다. 하교 후 학교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를 마중 나가던 길이었다. 5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시간은 해가 약간 기운 시간이었는데 저녁 공기가 시원했다. 학교의 긴 담벼락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이가 뛰어왔다. 아이의 옷차림은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에 앞머리를 날리며 "엄마~!!!" 하고는 뛰어 왔다. 그리고 이 순간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얼굴이 언젠가 다른 얼굴이 되겠지. 장난기 가득한 이 얼굴은 진지한 얼굴이 되겠지, 천진난만한 이 얼굴은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을 만나며 슬픔을 알아가겠지. 나를 스쳐갈 이 순간, 붙잡을 수 없는 순간임을 알기에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아이는 훌쩍 커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얼굴 보다도 뒷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내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아이를 나무의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감상할 수는 없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관조할 수는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날도 속상한 날도 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쳐올라올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알던 너를 떠나보낼 날이 왔다는 것을. 우린 지독히도 아름다운 순간을 보냈다는 것을. 고마웠던 한 시절이 가고 있다는 것을.


행복했던 순간이 소멸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관계의 양태는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되겠지만 소중한 시간이 남기고간 흔적들이 있다. 그 흔적들은 내게 머물다가 떠나간다. 잃어버린 것을 받아들일 때 상실의 슬픔은 그 채로 소진되어 사그라든다. 그리고 빈자리에 다시 소중한 '너'를 채울 수 있게 된다. 지금의 '너'는 사라져 가지만 새로운 '너'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기, 그리고 때를 알고 고이 놓아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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