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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호'보다 '양호열'이 좋았던 이유

by 정희주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있었다. 자율학습은 저녁 도시락을 먹고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교실이나 학교 독서실에서 자율적으로 필요한 공부를 하는 시간이다. 학원에 가거나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율학습 시간은 모두 해야 하는 의무적인 시간이었다. 공부하기가 지겨운 날이면 나는 친구들은 선생님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도보로 15분쯤 거리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 앞의 만화방으로 갔다. 인근 학교 중에서 가장 여성적이고 청순한 교복을 입은 우리 세명은 담배 냄새가 베인 소파에 앉아 당대 유명한 순정만화인 베르사유의 장미를 시작으로 책장을 한 면씩 정복해 가기 시작했다.


몇 달간 매일같이 만화방을 드나들던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만화방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대학 입시가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화방 멤버였던 친구가 '슬램덩크'를 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친구는 슬램덩크를 소장하고 싶다면서 만화책을 사 보기 시작했다. 당시 연고전 열풍으로 농구 경기의 인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출간된 농구 만화는 그야말로 히트였다. 그해 온 학교가 슬럼덩크로 들썩 거렸다. 읽었던 책을 돌려가며 읽고 또 읽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먹으면서 좋아하는 캐릭터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들은 주연급 농구선수 캐릭터인 강백호나 서태웅, 또는 정대만과 송태섭 등을 많이 좋아했다. 나는 이상하게도 농구부원도 아닌 백호군단 '양호열'에게 끌렸다.



슬램덩크의 대부분의 주요 캐릭터는 각기 비범한 능력이나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강백호는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농구 천재였고, 서태웅은 이미 완성된 천재, 채치수는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 정대만은 부활한 천재 슈터, 송태섭 역시 천재 포인트 가이드이다. 이렇게 모두 특별한 재능이 있지만 양호열은 이 가운데 특별한 재능도, 극적인 서사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슬램덩크 시리즈가 모두 나온 요즘에서야 양호열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에 '양호열'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친구들이 "왜 양호열이야?"라고 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친구들은 나를 독특한 취향을 가졌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양호열'에게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주인공이 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친구가 주인공이 되도록 돕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조심스러움이 많은 성격 탓에 내가 나서서 무얼 하지는 않아도, 무언가를 하려는 친구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친구가 회장 선거에 나간다고 하면 나는 친구의 뒤를 따라 필요한 것을 챙겨주었고, 예쁜 친구가 시기와 질투를 받을 때는 호위 무사가 되어주기도 했다. 친구가 학예회 때 발표회를 나간다고 하면 내 옷을 빌려 주기도 하고 그 친구를 빛나게 해 줄 것들을 찾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를 도울 때면 주변의 시선들이 다정하지 않았다. "넌 왜 쟤를 도와주는 거야?" "네가 쟤 부하냐?" 그런 비아냥들이 나의 선행을 시시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오히려 나의 선한 마음을 비꼬았다. 세상은 주인공이 되라고 했다. 앞에 드러난 존재가 되라고 했다. 최고가 되어 사랑받으라고 했다. 당시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게 쑥스럽고 관심 자체가 스트레스였던 터라 쉽게 주변의 말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나는 천재도 아니고, 피지컬이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으니 주인공이 되길 글렀다고 생각했다. 사랑받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양호열은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슬램덩크 만화 속에서는 재능을 가진 천재는 아니지만 양호열은 나름의 자체 발광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 강백호가 농구를 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기도 하고, 강백호의 숨은 재능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양아치스럽기는 해도 힘을 아무렇게나 휘두르지 않고 절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위할 줄 알고 섬세하고 책임질 줄 아는 그만의 존멋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에도 양호열의 캐릭터가 총체적으로 내게 내면화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내 눈에는 양호열의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양호열은 농구부원이 아닌 친구 강백호를 응원하는 '백호군단'의 멤버라 한계에 갇혀 있었다. 양호열의 존재가 극 중에 등장했다는 것이 잠시 나를 위로하기는 했지만 비주류 콤플렉스를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나는 오랜 시간 비주류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지방대를 나오고 취직을 하려고 했을 때도 나는 좋은 학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비주류였다. IT회사에 취직할 때도 이과를 나오지 않은 비주류였다. 회사 생활에서도 이것저것 잡탕으로 경력을 쌓은 비주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미술관 도슨트를 할 때도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비주류였다.


나는 비주류라는 생각에 위축되었고 주류가 되려고 노력했다. 주류에 어울릴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주류에 속하게 되면 나는 다시 비주류가 되곤 했다. 안정적이고 규모 있는 회사의 핵심 관계자가 될 수 있었지만 결국 퇴사를 결정했고, 서울에 이름난 학교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 주류에 속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 속에 깊숙이 가닿게 되면 나는 다른 '류(흐름)'로 방향을 바꾸었다. 큰 흐름을 계속 좇기보다는 다른 흐름을 타고 계속 흘러갔다. 나는 남들 눈에 크게 띄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갔으며, 그 속에서 나름의 감각이 생기 되었다. 나만의 주류적 감각, 나만의 스타일이 생겨났다.


나는 비주류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잘 알려지지 않는 것, 보기 드문 것, 쉽게 드러나지 않은 것에서 매력을 느낀다. 지금의 내 취향을 보면 큰 호텔보다는 사는 냄새나는 작은 민박을 좋아하고, 큰 관광지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더라도 역사가 깃든 장소를 더 좋아한다. 책을 고를 때도 베스트셀러나 매대에 표지를 드러내는 책보다는 매대 아래에 세로로 꽂힌 책을 찾아 펼쳐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비주류 감각은 취향에 그치지 않는다. 일을 할 때도 드러난다. 상담을 할 때는 특정 분야의 이론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온 감각을 총 동원하려고 한다. 그래서 TV에서 보던 상담사스럽지 않다는 말도 가끔 듣는다. 글을 쓸 때도 유명한 사람의 말을 빌리기보다는 나의 기억과 나의 감정을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렇게 나만 '류'를 만들어 가고 싶다.


비주류라는 것은 주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힘이 없어 보일 수 있다. 나의 비주류 인생의 시작은 남에게 주목받는 것이 싫고, 혹은 돈이 없고, 혹은 공부를 못해서 시작된 것은 맞다. 하지만 시작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나의 기쁨을 찾으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비주류 인생의 반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는 알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말이다. 어린 시절에 만난 '양호열'은 그 길의 마주침이었다. '나'의 길을 찾는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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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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