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동네에 좁게 흐르는 하천이 있다. 하천옆에는 자전거와 사람이 상행 하행으로 한 명씩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나있다. 저녁이면 나처럼 달리기를 하러 나온 사람들과 산책을 나온 가족들 그리고 길 옆에는 제멋대로 자란 들풀과 꽃들로 좁은 길이 가득 찬다. 하천은 비가 오면 범람을 하고 사람손이 많이 타지 않아서인지 작은 물고기들도 많고 해마다 철새들도 날아드는 재미난 곳이다. 야생 오리 새끼들이 무리를 지어서 헤엄을 치거나 가끔씩 자라 같은 보기 드문 생명체가 헤엄을 치는 것을 보면 좁은 길 위를 앞만 보고 걷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웅성거리곤 한다.
그날은 한 가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많이 봐야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기 허리까지 올라오는 수풀사이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비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아이 아빠는 '가면 안돼'라거나 '조심해라'하는 말로 아이를 막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뒤를 재빠르게 졸졸 따라다녔다. 나비는 꽃을 찾아 날고, 아이는 나비를 찾아 뛰고, 아빠는 아이를 쫓아 바삐 움직였다. 아이는 자신을 돌보고 있는 아빠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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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도 차마 못하는 말이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사시는 아버지는 나와 매일 통화를 나누었다. 통화 내용은 주로 불만과 걱정들이었다.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고민거리들이었다. 언제인가는 하도 친구와 가족들 흉을 보시기에 듣기가 좀 거북했다. 그래서 말하고 말았다. 불평 듣는 거 너무 힘들다고 말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억울함 반 슬픔 반을 채운 목소리로 네게도 차마 못하는 말이 있다고 하셨다. 어리석었던 시절이라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불만의 일부만 양을 줄여서 말하셨다고만 생각했다.
"네가 힘들까 봐 말하지 못했어"
친구가 힘든 일을 힘겹게 혼자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왜 그 말을 이제야 했냐고,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냐고 안타까워하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네가 힘들까 봐 말하지 못했다고. 네가 마음이 상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너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한 친구가 내 맘속에 들어 있는 고약한 것들에 대해 궁금해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내 마음을 알려는 것이 고맙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보드랍게 위로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친구의 방문을 허락할 수 없었다. 나의 폐허 속에 들어오라고 할 수 없었다. 그곳의 어둠과 무거움이 친구의 마음에 물들기를 바라지 않았다. 물론 함께 아파하겠지만, 그러면서도 괜찮다고 웃을 테지만, 그래서 주책없이 내 마음은 가벼워지겠지만, 친구의 마음이 상하는 게 싫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버지의 슬픈 목소리가 다시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 알 것 같다. 아버지는 고통을 내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혼자 삼키신 것이다. 내 몫의 고통까지 혼자 감당하셨던 것이다. 혼자 힘든 일을 겪고 있던 친구의 지친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감당하기 버거울 것 같아 그 말만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아꼈기에 내가 상한 것이 싫었던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한다. 작은 사랑은 더 큰 사랑을 보지 못한다. 나를 사랑했던 이들은 내가 다칠까, 혹시 상할까 노심초사하며 나를 살피었다. 그래서 차마 이 말만은 딸에게 하지 말자. 이 고통만은 너에게 넘기지 말자하며 입술을 깨무셨을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내 사랑보다 그들의 사랑이 더 컸기에 작은 내게는 그들의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땅에 붙어사는 개미가 더 큰 존재인 사람을 볼 수 없듯이, 3차원에 사는 사람이 4차원의 존재를 알 수 없듯이, 작은 사랑에게는 더 큰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더 큰 사랑을 알기 전에는 그 사랑을 가늠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