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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약이 남긴 '진짜' 위로

by 정희주

어린 시절에 살던 집 앞 큰길 너머에는 깡시장이 있었다. '깡'은 이윤이 없이 물건을 싸게 판다는 뜻이다. 깡시장은 새벽 5~6시 정도에 열리는데 이때는 농수산물 경매가 이루어지고 경매가 끝난 물건들은 일반 소비자들에게 보통의 가격을 판매된다. 서울가락시장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규모가 튼 시장이었다. 그 시장에는 청과 골목, 생선 골목, 순대 골목, 잡화 골목 등 나름 주제별로 구획이 나눠져 있었고 골목 중간에는 무점포 리어카가 기다랗게 줄을 지어 물건을 팔았다.


엄마는 저녁 늦게 시장에 다니셨는데 나는 자주 엄마를 따라다녔다. 시장에는 볼 것이 정말 많고 재미있었다. 새벽에 깡이 끝나고 나면 공터에는 가끔 외부에서 온 뜨내기 상인들이 보따리를 풀기도 했다. 그날은 약장수가 찾아왔다. 약장수는 머리털이 한 없는 빡빡이 머리에 승복 입고 있었고 자신을 스님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엄마는 땡중이라고 부르셨다. 그 땡중 무리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쇼를 했다. 키가 작은 난쟁이들이 나와서 서커스를 하기도 하고 불쇼와 차력쇼도 했다.


엄마와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약장수가 준비한 쇼를 한참을 구경했다. 쇼가 다 끝나고 나자 땡중은 약을 팔기 시작했다. 위스키병 같이 생긴 것에 담긴 검은색 물약이었다. 이 물약은 모든 병을 고친다고 했다. 초등학생의 어린 나 조차도 저런 가짜약을 누가 살까 싶었지만 주변에서 사람들이 약을 사겠다고 손을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엄마까지 손을 번쩍 들었다. 한 병에 만원이나 하는데, 저런 이상한 약을 산다고? 그것도 우리 엄마가?


엄마는 엄청난 짠순이였다. 늦은 시간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떨이로 파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채소 가게에서는 버리는 무청을 얹어다가 말려서 시래기를 만들기도 했고 수박껍질도 반찬을 만들어주셨다. 엄마는 각티슈 한 장도 아깝다고 온전히 쓰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린 나도 알법한 저런 약을 산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약장수를 향해 흔들고 있는 엄마의 팔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엄마는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내 팔을 뿌리치셨다. 그때 엄마가 좀 무섭게 느껴졌다. 엄마는 왜 그런 가짜 약을 산 것일까? 누구를 주려고? 무엇에 쓸려고?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엄마에게 그 일을 물었다. 엄마는 내 말을 듣고는 깔깔대며 웃으셨다. 엄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으셨던 거다. 엄마는 "뭐라도 해야 했었어"라고 말씀하셨다. 오빠는 축농증에 걸려서 20년 가까이 콧구멍으로 숨을 쉬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마르고 약했는데 축농증까지 생기고 나니 엄마는 자식을 잘 돌보지 못한 어미라며 자신을 탓하셨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 잘 못 먹어서 애가 삐쩍 마르게 태어난 것 같다든지, 돈을 아끼려고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제때 가지 못했는데 그래서 축농증에 걸린 것 같다 등등, 오빠의 허약함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셨다.


엄마는 오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종합병원에서 양약도 먹이고 용하다는 집의 한약도 먹이면서 적극적인 치료를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쓸 약이 없어지자, 엄마는 민간요법을 알아보기도 하셨다. 목련꽃을 달여 먹으면 효과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비가 오는 날이면 떨어진 목련꽃을 주우러 다니기도 하셨다. 그러다 오빠는 군대에서 제대할 무렵 축농증이 완치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엄마는 군대에서의 규칙적인 생활과 교외의 맑은 공기가 병의 호전에 도움을 준 것이 아닐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오빠의 병이 나았다.


그날 시장에서 샀던 약은 가짜였을까? 그 약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으므로 가짜가 맞다. 하지만 그 약은 아들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가진 어미의 마음을 위로했다. 엄마도 그 약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은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가짜 약은 엄마에게 최선이었다.


엄마는 가짜약을 맹신하지도 않았고 지속해서 의지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어리석은 행동임을 알고 있었고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오빠를 위해 실내용 운동기구를 샀다. 그리고 매일 같이 새 밥을 하고 달인 보약을 보온 통에 넣어서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오빠에게 실어 날랐다.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와 지난한 과정들을 거쳐 오빠의 병은 완치에 이르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길을 찾게 된다. 가짜약을 만나게 될지라도 제대로 된 방향을 발견하는 순간 지난 일들은 모두 과정이 된다. 언젠가 내가 지나온 시행착오의 역사들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 그때가 되면 서커스를 보여준 '약장수'와 '목련꽃'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운동'도 하고 '밥'도 잘 지어 먹으며 해야할 일을 해야겠다.



스크린샷 2025-08-15 140324.png 앙리 르바스크 <딸과 함께 있는 르바스크 부인>,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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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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