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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너머에서 만나자

by 정희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집은 2년 동안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꽤 많은 화분을 기르고 계셨다. 내가 꼬맹이였던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온 육손이를 포함해, 크고 작은 화분들이 스무 개 남짓 있었다. 그 화분들은 엄마가 평생을 길러 오셨고,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아버지가 입원하신 동안에는 오빠가 돌보았다. 그 화분들은 우리 가족의 분신 같은 존재였다.


오빠는 화분을 정리할 수 없다고 했다.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화분을 기르고 싶다고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도 화분들은 무성하게 자랐다. 그러다가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 식물들은 시들기 시작했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되면서 화분은 어둡게 시들어서 더는 미련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그 화분을 시작으로 집 정리를 시작했다.


집 안에서 아버지의 물건을 하나씩 꺼내보니,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나왔다. 엄마와 아빠의 오랜 병상 일지가 빼곡히 적힌 수첩, 흑백사진 시절부터 모아둔 증명사진, 성경책에 끼워둔 편지들….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다 안방의 경첩 달린 작은 서랍을 열었다. 다른 서랍들은 짐으로 가득해 문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 서랍 안에는 칸칸이 간소한 물건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도 그 서랍 안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알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서랍 하나에는 편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 아빠가 받아온 작은 생일카드들과 편지들이었다. 그중에는 내가 고등학교 때 보냈던 편지도 있었다. 헉, 그 편지를 읽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편지 속에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 편지를 쓰던 시간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어버이날을 기념해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하셨다. 막상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난감했다. 당시 나는 부모님께 많은 불만이 있었다. 누군가 내 방 책상과 서랍을 뒤진 흔적이 있었고,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할 때면 거실 전화기에서 내 통화를 엿듣는 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엄마였다. 그럴 때마다 짜증도 내고 소리도 질러봤지만 엄마는 매번 시치미를 떼셨다. 결국 한 달 가까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런 불화 속에서 부모님께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낼까? 아니면 형식적인 내용으로 채울까? 고민 끝에 결국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마음을 썼다. 그땐 부모님을 이해할 만큼 성숙하지도, 내 입장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재치도 없던 시절이었다.

편지에는 싫은 것들에 대한 불평이 가득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내 삶은 내가 헤쳐 나갈 테니 간섭하지 말고 지켜봐 달라고 썼다. 그리고 그 말을 평소 부모님께 하던 대화체 그대로, 반말로 적었다. 편지를 쓸 때는 그렇게 당당했건만, 부모님을 잃은 지금 그 편지를 다시 읽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마음이 미어졌다.


부끄러움이 조금 가라앉자, 그 편지가 오랜 세월 동안 서랍 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어째서 그런 불경스러운 편지를 받고도 화를 내지 않으셨을까? 어째서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랑스러운 편지들과 함께 간직하셨을까?


그 편지를 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닫혀 있던 사춘기 아들의 방이 열리더니, 아이는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울타리’와 ‘장미’라는 제목의 시 두 편이 적혀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이었다. 내가 부모님께 썼던 편지의 내용처럼, 아들은 내가 쳐놓은 울타리를 넘어가고 싶다고 했다. 처음 시를 읽었을 땐 걱정과 불안이 앞섰다. 혹시라도 힘들면 어쩌지, 혼자 외로워하면 어쩌지. 그러나 잠시 흔들리던 마음은 곧 가라앉았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 역시 부모의 권위에 맞서고 싶었던 당돌한 마음이었다. 편지를 쓰며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혼이 나더라도 내 마음을 솔직히 표현하고 싶었다. 다시 아이의 시를 읽었다. 그 글은 부모인 내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답답하다는 고백이었다. 아이는 어느새 나의 울타리를 넘을 만큼 자라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을까? 부모님께서는 편지를 받고도 나를 혼내지 않으셨다. 그저 “편지는 존댓말로 쓰는 거야.”라는 말씀만 하셨을 뿐, 내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뒤로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성적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부모님 역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감추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당신들의 불안을 내게 티 내지 않으셨다. 그 시절 여전히 집이라는 울타리와 입시의 압박은 부담이었지만, 나는 울타리 밖의 미래를 상상하며 나름 활기찬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지난 시간들이 모여 나는 부모의 울타리를 넘어 나의 세계를 향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 아이는 자기의 세계를 꿈꾸고 있다. 자신의 울타리를 자각하고, 자기 모습을 탐색하고 있다. 아들이 내게 보여준 시는 하나의 인연이 끝나는 이별편지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 같기도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응원해 주셨듯, 이제는 내가 침묵으로 아이를 응원할 때가 된 것 같다.


“얘야, 울타리를 넘어가거라. 울타리를 넘어, 너의 세계를 만들거라.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만나자.”



칼 라르손, <낚시>,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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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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