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 시대의 미술사를 공부하던 중 초상화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무엇이 매너리즘적이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매너리즘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너리즘에 빠지다"와는 구분되는 용어이다. 매너(마니에라)는 넓은 의미의 양식(스타일)을 의미한다. 그 작품만이 가지는 고유한 양식이 있을 때 '마니에라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매너리즘은 16세기 무렵, 미술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중으로 전개된 화풍으로 르네상스가 끝나가는 시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신의 논리가 지배하던 중세말기에 나타난 문예부흥 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 미술은 고대 그리스의 이상주의를 보다 인간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이상주의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속화되었던 현실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 종교의 부패, 자본의 횡포 등으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예술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매너리즘 미술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서 추구하였던 이상적 균형과 통일성이 해체되었으며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하는 양식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매너리즘의 그림은 부조화스럽고 왜곡된 특징을 보인다.
브론치노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녀의 아들 조반니의 초상>, 1545, 96 x 115 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녀의 아들 조반니의 초상>을 보면 첫눈에는 다분히 고전주의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 두 인물 간의 구도, 현실적 표현 등이 질서 정연하게 그려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계속 그림을 보다 보면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지나친 경직성이다. 지나친 통일성과 안정감은 인물의 생기를 사라지게 했다. 그림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지나친 차분함에는 음울함도 배어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인 엘레오노라는 피렌체 메디치가문의 후계자인 코시모 1세의 부인이다.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가 지난 16세기에도 피렌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코시모 1세는 자신의 부와 정치력을 이용하여 그 어느 선대 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려고 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엘로오노라와 그의 아들 조반니는 가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와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림 상세-왜곡된 이미지들
다시 작품 속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마치 갑옷을 입은 듯 보인다. 바람하나 통할 것 같지 않은, 바늘 하나도 들어오지 못할 것 같은 드레스로 온몸을 두르고 있다. 그러나 그 옷이 편하지 않은지 몸의 자세가 불편해 보인다. 허리는 빳빳이 곧추선 자세이지만 왼쪽 손가락은 어색하게 늘어져 있으며 아들의 어깨를 감싼 오른쪽 손가락은 마디가 꺾여있다. 그녀의 내면의 긴장과 불안함을 오직 손끝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들 조반니의 손도 편하지 않다. 꽉 쥐어진 오른손은 경직되어 있으며, 엄마의 허벅지에 대고 있는 왼손은 관절이 꺾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비현실적인 포즈이다.
이러한 경직성에 대해 예술 비평가인 아놀드 하우저는 그의 저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에서 “냉철한 자세의 갑옷 뒤에 숨겨진 균형이 흔들린 영혼"이라고 표현했다. 갑옷 뒤에 숨겨진 영혼이 그림 속에 드러난 것이다.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은 무엇일까?
명망가들만이 갑옷을 입고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린 저마다 갑옷을 입고 산다. 갑옷을 입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갑옷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림 속 주인공 엘레오노라는 외세의 침략과 가문의 권력에 대항하는 이들에게 권위와 품격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친 나머지 그 옷에 자신의 몸을 억지로 끼워 맞춘 꼴이 되어 버렸다.
16세기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갑옷에 대한 많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어떤 이는 화려한 스펙으로 갑옷을 두른다. 높은 학위와 학식을 자랑한다. 이것이 과도해지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돈으로 갑옷을 두른다. 좋은 차와 명품 가방을 두르며 높은 지위가 있다고 뽐낸다. 그것이 과도해지면 자신이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이며 혹은 교양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취를 자신의 갑옷으로 생각한다. 자식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자식 농사가 성공했다고 말하고 이것이 과도해지면 인생 농사가 성공한 체한다. 어떤 어떤 사람들은 나이로 갑옷을 두르고, 어떤 사람들은 사는 지역으로 갑옷을 두르고, 어떤 사람들은 늙지 않는 피부로 갑옷을 두른다.
때때로 이 갑옷은 효과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높은 학위, 출신 대학, 사는 지역, 입고 있는 옷차림새 등등은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행복해 지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보이는' 사람을 동경하게 된다. 이런 과시와 동경이 어느 수준을 넘어가게 되면 갑옷 속의 진짜 모습을 잃게 된다. 본래 갑옷의 기능인 자기 보호의 기능은 사라진다. 주인을 잃은 갑옷은 정체 모를 생명체로 자가진화해 버린다.
나는 '착한 사람'이란 갑옷을 입었었다. 흔히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귀로도 잘 들어주고, 마음으로도 잘 들어주고, 가능하다면 행동으로도 도와주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잘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그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공감 안되는데 이해하는 척하게 되고, 불쾌한 말을 들었지만 괜찮은 척하게 된다. 착한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상대의 목소리에 반응만 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그 착함이라는 갑옷은 매우 교묘하다. 타인으로부터 호감을 얻기도 하고, 좋은 평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갑옷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식하기 어렵고 벗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 저 그림 속의 여인은 허리를 편하게 기댈 수도 없는 옷을 입고 있느라 몸이 뒤틀려 있다. 그러나 그 옷을 벗을 수도 없다. 자신의 권세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갑옷을 입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맨 몸으로 세상과 만나야 한다. 온전히 자신으로, 진실성으로 세상과 만나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오해'를 통해 세상과 부딪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년이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선을 향한다는 것은 내 안에 악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안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행했던 악행이 있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착한 사람이라는 갑옷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갑옷을 입었다는 것 그 자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이기적인 수단에 불과했던 것뿐이지, 상대를 위한 배려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착함'을 통해 사랑(인정) 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으니 말이다.
결국 '착한 사람'이라는 갑옷은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였기에 내가 하는 말들이 타인에게 반드시 이로운 말이라는 보장은 없다. 무기력한 친구에게는 그저 듣기에 달콤한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몸을 일으켜 세워 같이 뛰어야 했고, 자기기만에 휩싸인 친구에게는 그 기만의 껍질은 벗어도 괜찮다고 말해야 했고, 남 탓만 하며 억울해하는 친구에게는 그 앞에 거울을 비춰주었어야 했다. 나는 인정이라는 달콤함을 얻기 위해 오해를 감수하지 못했다. 진실하지 못한 친절이었다.
갑옷을 벗은 순간을 상상해 본다. 겉이 딱딱한 갑각류들은 성장을 하기 위해 탈피를 한다. 성장하는 그 순간이 가장 연약한 순간이다. 탈피한 그 순간에 천적에게 공격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옷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잡혀 먹힐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탈피를 하고 연약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성장을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갑옷을 벗어야 한다. 통념일지도 모를 지식, 편협했던 경험, 가진 것 이상의 허영을 벗어야 한다. 단단한 갑옷을 입은 채 세계와 감응할 수는 없다. 맨 몸이 되어야 떨리는 상대의 움직임을 예민하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약함을 감수하며 만난 세계는 내 몸에 무늬를 만들어 낼 것이다. 기쁨과 슬픔으로 버무려진 나만의 옷을 만들게 될 것이다. 연약함을 드러내보자. 오해를 각오해 보자. 그렇게 세상을 느껴보자. 더 큰 기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