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았다. 직장에서도 내 몫 이상을 일했고 가정에서도 내게 이름 붙여진 역할을 충실히 다하려 했다.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며 열심히 살면 행복이 내 것이 되는 줄 알았다. 순간 내 것처럼 느껴지는 달콤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져 가고 갈증만 크게 남았다.
성취와 실망이 반복될수록 공허감이 커졌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불안의 정체가 잘 인식되지 않았다.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고 이 막연한 두려움은 일상의 긴장감과 초조함을 만들어 냈다. 내가 생각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불만족한 삶을 살다가 늙어 죽어가게 되라라는 것을 몸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무의식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며 계속 신호를 보냈다.
나를 찾고 싶었다. 나를 알고 싶었다. 시류에 떠밀리듯 사는 것이 아닌, 본래의 내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런 갈망이 나를 많은 것으로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미술이었다. 예술가들이야 말로 본래의 자신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아니던가. 타협을 싫어하고 저돌적이며 때론 자기를 파괴시키면서까지 새로움을 창조를 해내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렇게 시작된 그림공부에서 수많은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려진 '나'
① 르느와르 <부지발에서의 춤>1883 ② 르느와르 <머리 땋는 소녀> 1887 ③ 로트렉 <숙취>1889 ④ 로트렉 <수잔 발라동의 초상>1885 ⑤ 드가 <목욕통>188
위 그림 속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 그림들은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을 모델로 그려진 그림들이다. 수잔 발라동은 당시 예술가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모델이었다. 수잔 발라동은 퓌비 드 샤반느(P. P. Chavannes)와 일을 한 계기로 오귀스트 르느와르(Auguste Renoir), 툴루즈 로트렉(Toulouse Lautrec),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수잔 발라동은 르느와르의 <부지발에서의 춤>(1883)에서는 활발하고 생기 있게 묘사되었으며, <머리 땋는 소녀>(1887)에서는 관능미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의 수잔은 삶의 고단함을 알지 못하는 젊고 아름다운 관능적인 사람이다. 반면 로트렉의 그림에서의 그녀는 고단하고 피로한 모습을 그려졌다. <숙취>(1889)에서는 술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모습이며, <수잔 발라동의 초상>(1885)에서는 삶을 대하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드가의 <목욕통>에서의 여인은 인물에 대한 감정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성이 주는 매력이나 관능미 보다도 여성의 몸이 주변 상황 속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르느와르가 자신이 이상화하는 여인의 모습을 남성의 시각으로 그렸다면 로트렉은 수잔 발라동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드가는 르느와르처럼 노골적으로 관능성을 부각하지는 않고 오히려 사물처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 평소 생활을 하는 모습처럼 일상의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여체의 모습이다.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수잔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실제 수잔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잔 발라동 <자화상> 1883년
수잔 발라동의 본명은 마리 클레멘타인 발라동이다. 마리 클레멘타인은 미혼모에게 태어나 파리로 이주한 뒤 허드레 일을 하다가 15세에 서커스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녀는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며 재능을 보이던 중 그네에서 떨어지게 되어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에 친구를 따라 화가의 모델을 하게 된다. 수잔은 화가들에게 매우 유명한 모델이었다. 앞에서 거론된 르느와르, 로트렉, 드가뿐 아니라 몬드리안과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이 그녀를 그렸다.
수잔 발라동은 화가들의 모델을 하면서 자신이 작품에 일부로 기여한다는 만족감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르느와르의 모델이 되면서도 그녀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르느와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르느와르에게는 영감을 주는 뮤즈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로트렉은 달랐다. 로트렉의 그림에서 그녀는 겉모습 보다도 내면을 그리려 한 것처럼 그녀의 욕망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로트렉은 그녀가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드가를 소개해 주었고 화가로써의 새로운 삶을 위한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리 클레멘타인은 그렇게 수잔 발라동이 된다. 드가는 인간으로서 여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예술가로서 수잔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가르쳐 주는 등 예술가로서의 길을 열어 주었다. 수잔은 드가가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동료 화기이기도 했다.
그리는 '나'
수잔 발라동 <파란 방> 1923년
수잔은 여성 화가 전시회에 작품을 전시한 것을 포함하여 많은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1894년 국립미술협회에 작품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예술가이기도 했다. 당시 여성들이 화가로 활동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소수의 여성화가들이 있었으나 많은 경우귀족 출신이거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 뒷받침이 되는 형편이었다. 수잔처럼 화가의 뮤즈가 예술가가 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화가의 뮤즈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의 정부(情婦)가 된다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하기도 했다. 수잔은 사생아로 태어나 서커스 단원, 세탁부, 모델 등의 일을 해오며 당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과 달리 제도건밖의 삶을 살았다. 그림 또한 제도권 밖에서 배웠다. 이런 그녀는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수잔 발라동, '아담과 이브', 1909, 캔버스에 유채, 162x131cm, 프랑스 국립 현대미술관
수잔 발라동에게는 그려도 되는 것과 그리면 안 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 당대의 여성 화가들의 주제가 중산층 가정의 실내나 가족들의 생활하는 모습들이었다면 수잔 발라동은 남녀의 벗은 몸을 그렸다. 특히 남성의 몸을 여성 화가가 그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기존의 화가와 모델의 관계 그리고 전통적인 여성과 남성이 모습을 전복시켰다.
수잔은 여성의 누드도 많이 그렸다. 주로 실내에서 생활하는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의 목욕을 도와주는 어머니라던지 젊은 여성이 목욕하는 모습들을 그렸고 의자에 앉아서 편안하게 쉬는 모습도 많이 그렸다. 수잔이 그린 여성은 풍만하고 육감적인 면이 강조되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몸의 살집이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고 툭 튀어나온 뱃살도 미화시키지 않았다. 그녀가 그린 여성의 누드는 남성 드린 그린 여성과는 다르게 일상적이고 꾸밈이 없다. 이상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자연스레 표현되어 있어 활기 있고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내가 그리는 '나'
<수잔 발라동 자화상> 왼쪽부터 1898년, 1911년, 1927년
수잔은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모델로써 일했던 만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자신을 찾고 싶었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녀의 자화상은 자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여준다. 자화상속 그녀는 르느와르의 그림처럼 터질듯한 관능적 아름다움이 없으며 로트렉이 그림처럼 피로에 지쳐 보이지도 않는다. 수잔 발라동의 자화상은 안쓰럽지도 않으며 아름다움이 과장되어 있지도 않다. 캔버스 속에는 그저 자신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한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누가 진정한 '나'인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할 수 없다.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라온 사람은 그에 맞는 미적 감각을 발달시키고 그에 맞는 우아한 그림을 그릴 것이다. 상처투성이지만 자유로움을 감당하며 열정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그 배경에 기반한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잔 발라동은 르느와르와 만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하였으며, 로트렉을 만나 내면의 자신을 알아보는 안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솔직한 열정은 드가와의 만남으로 이어져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수잔 발라동이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서커스에서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모델이 아니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과연 화가가 되려 했을까? 물론 그녀와 같이 고난한 처지가 아니더라도 화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 화가들의 그림과 수잔의 그림은 달랐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여성화가들이 다루는 주제는 일상생활에 한정되었지만 수잔 발라동은 실내 생활 모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성의 누드를 그렸으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모델로 하였다. 작품에 대한 비난뿐 아니라 사생활에 대한 염문도 많았다. 하지만 수잔 발라동은 삶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어 왔던 고단한 삶이 새로운 예술세계를 여는데 든든한 체력이 되어 주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주제선택과 표현방법은 다른 화가들과 달리 파격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수잔 발라동 사진
지금의 '나'가 곧 '나'다
수잔 발라동이 자신의 그림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원한 화가들의 뮤즈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상화된 모습으로, 화가들이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으로 그림 속에 박제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걸어간 만큼, 그녀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 낸 만큼, 그녀 자신의 삶을 살아 낸 만큼의 그녀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녀가 살아온 만큼의 진정한 그녀를 나는 만났다.
진짜 나는 어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가 바로 '나'다. 관습과 훈육 속에 길들여 있는 '나'가 바로 나이며, 그것에서 벗어난 만큼의 '나'가 바로 나이다. 과거의 상처와 기억 속에 젖어 있는 것이 바로 '나'이며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며 변화한 만큼이 바로 '나'이다. 진정한 '나'가 어디 숨겨져 있는 것도 새롭게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의 '나'가 바로 '나이다. 내가 살아온 만큼 내가 살아낸 만큼이 바로 '나'인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나'인가. 나는 그림과 삶을 연결하려 하고, 나의 세계에서 너의 세계로 확장하려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순간이 좋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울고 떠드는 가운데 오가는 감정의 교류를 즐긴다. 나는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 관계 속에서 변화할 것이고 변화한 만큼 '나'가 되어갈 것이다. 더 이상 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그 모든 탐구의 시작과 끝은 '지금-여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