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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26. 2023

희망과 절망, 그 사이를 견디기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캔버스에 유채, 50.5x103 cm, 암스테르담 반고흐 뮤지엄 소장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반고흐가 사망하기 두 달 전에 그려진 작품이며, 그의 사망이 자살이라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림 속 밀밭 위에는 검푸른 먹구름이 뒤덮여 있어 햇살이 뚫고 나올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저 멀리 구름 두 점만이 아직 먹구름이 내려오지 않았음을 보여주지만 뚜렷한 형태가 없는 구름의 모양에는 힘과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림 아래쪽을 보면 황금빛 밀밭은 세 가지 길로 갈라져 있다. 그 세 개의 길 중 어느 한 길을 뚜렷이 목표하지 못하고 있다. 가운데 길은 밀밭 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으며 양쪽의 길은 불분명하게 그려졌다. 흔히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절망과 혼란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림에는 소실점이 분명치 않아 불안하며, 붓터치가 매우 거칠고 무질서하며 신경질적 이기까지 하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쓴 기록이 있다. 그러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정확히 지칭한 것은 아니어서 고흐의 정확한 감정상태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흐는 다른 그림에서 자신을 밑밭을 경작하는 농부로 표현해 왔기 때문에, 자신이 희망했던 것에 어둠이 밀려내려오고 있는 상태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고흐의 사인에 따라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질 수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자살설이다. 고흐의 사인을 자살로 보았을 때 이 작품은 절망과 혼란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밑밭 위에는 날아다니는 까마귀는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고흐의 사인을 또 다른 가설인 타살설로 본다면 좀 더 다르게 보일 여지가 있다. 줄리앙 쉬나벨 감독의 <영원의 문>(At Eternity's Gate,1998)을 보면 고흐의 타살설에 근거하여 고흐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고흐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는 대중들의 무시와 멸시, 그리고 내적으로는 정신착란으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자연과 그림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음을 보여준다. 


  다시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바라보자. 하늘과 맞닿을 만큼 널은 황금의 밀밭이 펼쳐져 있다. 저 위에 하늘에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지만 그러나 까마귀는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하늘의 길로 계속 날아가고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큰 세 개의 길이 눈앞에 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그리고 무엇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쉬움도 아니다. 그저 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밀밭의 희망과 먹구름의 절망을 똑바로 바라본 채 길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닥쳐온 그 상황을 똑바로 응시하며 지켜보고 있다. 고흐는 자신이 본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고흐는 자신이 당면의 내면의 숙제를 바라본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고흐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모순의 상태를 견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희망과 절망이라는 감정은 왜 생기는가? 


스피노자의 희망과 절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희망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변덕스러운 기쁨이다. (중략) 절망감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에티카』스피노자

희망은 어느 정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갖게 되는 불확실한 기쁨이다. 기대하는 미래가 있지만 결과에 대해 의심의 마음을 품고 있기에 그 기쁨은 변덕스럽다. 절망감이란 의심이 제기된 미래를 떠올렸을 때 생기는 슬픔이다. 기대했으나 그 기대가 제거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기는 슬픔이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 '관념'에서 생기는 것들이다. 관념은 실제 지각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결과가 아닌 머릿속에서 생각되는 것들이다.  또한 '의심하고 있는 미래' 또는 '의심하는 것에 한 과거의 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때론 기쁨이기도 하고 때론 슬픔이기도 하다.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보면 희망과 절망 모두가 들어 있다. 희망은 밀밭을 자라게 하고 절망은 태양의 빛을 가려 성장은 멈추게 한다. 희망은 행동하게 하고 절망은 그 행동을 멈추게 한다. 희망과 절망에서 기대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기에  희망과 절망사이를 오갈 때 우리 마음은 너덜해 진다. 



나는 언제 희망했고 언제 절망했을까? 


나는 '나로 사는 삶'을 희망했다. 학창 시절에는 '평범한 모범생'이었으며 직장생활을 할 때는 '우수한 모범사원'이었다. 결혼을 하고서는 가정에 '충실한 주부'이자 '아내'였으며 부모님들께는 '착한 딸', '수더분한 며느리'였다. 친구들에게는 분위기 잘 맞추어주고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 난 '모범스런'과 '착한'이라는 수식어에 질식되어 갔다. 그건 나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나는 나를 찾겠노라 과감히 사표를 내고 프로 취미생활러가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일들을 찾아 여러 가지 일들을 시도해려고 했다. 그러나 '나로 사는 삶'을 참 지독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쁜',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장착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때론 가족을 실망시켜야 했고 나를 중심에 놓아야 하기도 했다. 타인에 대한 비난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 대한 도덕규율을 깨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희망과 절망사이를 반복하며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목표를 세우고 매진한다고 해서 꼭 원하는 결과가 뒤딸아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난 자판기 앞에 서 있는 아이처럼 동전을 넣었으니 내가 원하는 음료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기력이 들던 어느 날, 당장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나로 사는 삶'을 포기하겠냐고 자문해 보았다. 아니었다. 난 내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심장이 뜀박질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오늘도 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그림을 본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마음을 담은 연락을 주고받는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결과가 나를 기쁘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더라도 나의 일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 그것이 희망과 절망사이를 견뎌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흐는 농부를 좋아했다. 농부의 내면을 느끼고 그리는 일은 중요하다고 말하며, 농부의 진실하고 정직한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농부는 땅을 일구며 몸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 곡식을 얻는다. 매일 몸을 움직여 일하는 농부의 마음처럼, 매일 그림을 그린 고흐의 마음처럼, 나도 매일을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며 하루를 부딪혀 나가겠다.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 의심하는 마음을 실제 하는 것으로 만들어 나가겠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 사이를 묵묵히 걸어가겠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고흐의 절망이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명암이다. 기쁨과 슬픔이 모두 들어 있는 우리의 삶이다. 어둠을 안은채 밝음으로 나아갈지, 어둠에 질식될지 그것은 보는 이의 시선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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