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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Jun 29. 2023

본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만난다

황재형 <아버지의 자리>

황재형 <아버지의 자리> 2011_2013, 캔버스에 유채, 227.3x162.1cm. 개인소장


  민중미술작가로 알려진 황재형 작가는 '광부 화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광부를 더 잘 그리기 위해, 광부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 광부가 되었다. 황재형 작가는 탄광촌 노동자로써 자신의 경험을 일기처럼 그렸으며, 88년 이후 탄광촌이 쇠락하는 모습을 거대한 자연 속에 투항하는 형태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탄광촌에서 시작된 그의 독백은 도시인의 삶과도 연결되어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며 현재의 나의 삶의 이야기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작품을 보자. 21년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황재형 작가 전시장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보고는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극사실주의로 표현된 이 작품은 마치 초상화를 보는 것처럼, 실제 사진을 확대해 놓은 것처럼, 아니 내 마음에 들어 있는 한 사람의 상이 스크린에 투사된 것처럼, 아니 눈이 아닌 감정을 생생히 그려 낸 것처럼, 작품 속에는 사실적 묘사와 실제적 감정이 동시에 일어났다. 작품 속 남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거리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는 듯 그의 입과 턱 주변에는 주름이 잔뜩 힘을 주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시선이 머물면서도, 계속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무언가 형언하기 어려운 슬픔과 아픔, 그리고 그리움이 들어 있다. 계속 보고 있기에는 눈물이 쏟아 질 것 같고, 눈을 피하기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그림을 마주하기 힘든 이유는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네 아버지의 한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한 모습을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남자는 늙었다. 그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있었던 그 주름 많음 많았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 남자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다. 그 앙다문 입술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침묵해야 하는, 아니 일찍이 침묵을 배웠던 한 남자의 서러움이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가 소리 없이 우는 마른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의 목에 떨림이, 그의 어깨의 들썩거림이 느껴질 것만 같다. 시원하게 말하지도, 분노하지도, 울분을 토하지도 못하는 그의 감정이 그림 속에 가득 들어 있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와 만나는 일, 낯선 나를 견디는 일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나의 기억과 감정을 만나는 일이다. 나의 내면을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 그림을 볼 때 나를 고양시키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힘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림을 만나게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그림은 내가 긍정하고 있는 나의 욕구와 감정일 것이며, 나를 불편하게 하는 그림은 내가 부정하고 있는 나의 욕구와 감정일 가능성이 크다. 낯설어서 부정되거나, 소화되지 못해 꺼려지는 감정들이다.


<아버지의 자리>는 힘든 감정을 건드린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회한으로, 누군가에게는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누군가에게는 힘든 시간에 대한 연민으로, 누군가에게는 헌신에 대한 묵직한 감사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 후 기억과 감정이 변화된 어느 날 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된다면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좋은 그림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준다. 그리고 좋은 그림에는 수많은 인생이 담겨 있다. 그림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림이 내게 주는 파동을 견딜 수 있을 때, 낯선 그림과 낯선 나와 직면할 수 있을 때, 나는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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