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이야기
어젯밤에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그동안의 꿈과 다른 점은 예지몽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을 꿈꾸었다는 것이었고, 임상혁의 몸에 칼을 꽂은 사람이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임상혁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그는 말하지 못했고 나는 듣지 못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난 나는 상혁의 피가 손에 묻어있는 환영을 보았다.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 손을 박박 씻었지만 피는 묻어 나오지 않고 무색의 물만 수면대의 개수대로 빠져나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올랐다. 온라인 뉴스와 유튜브에는 임상혁의 죽음에 대한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서울로 돌아온 며칠 뒤에 중국 공안에게 체포된 신성일 전무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검찰의 수사요청으로 그들의 수사를 도왔지만 임상혁이 갖고 있던 USB에 결정적인 증거들이 모두 들어있었기 때문에 나의 진술은 참고용일 뿐이었다. 대형그룹을 상대로 한 재판이 시작되자 법원에 출두하여 내가 지금까지 보고 겪은 것을 증언했고, 재판에서 이경도, 이재영, 그리고 신성일에게 중형이 선고되었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나만이 아는 나의 죄에 대해서 단죄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재판이 끝나자 대형그룹과 유비쿼터스와 임상혁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가기 시작했다. 나는 대형그룹에서 배신자라는 주홍글씨가 가슴에 찍힌 채 퇴사했다. 내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배신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남들이 나를 무어라 부르던 개의치 않았다. 퇴사를 한다고 해서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없었지만, 코털에게 작별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대형그룹을 떠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코털과 유비쿼터스를 떠난다는 사실은 아팠다. 임상혁이 살아있었다면 인수합병 무효소송이라도 제기했겠지만 상상 속의 일일 뿐이었다. 최근에 회사에 닥친 풍파 때문에 고생이 많았는지 코털의 코털은 더 하얘졌지만, 여전히 자상한 코털은 여기저기 내가 옮길만한 회사를 알아봐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멍하게 하늘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항상 나를 믿어주시던 부모님은 서서히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부모님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백수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지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멍하게 보낸 시간은 마음속에 어둠을 대신해 여백을 남겼다. 자신은 없지만 이제 천천히 임상혁과 임인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임인애와 그리고 이제는 임상혁이 안치되어 있는 용인의 납골당으로 향했다. 남매이자 연인이었던 임인애와 임상혁은 납골당에서 나란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임인애의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인애 씨, 이 모든 일이 당신과 나 때문에 일어난 걸 알고 있나요?”
사진 속 임인애는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었다. 옆에 있는 임상혁의 사진을 보았지만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당신이......”
겨우 꺼낸 말은 한동안 오열로 이어졌고 다시 침묵으로 잠겼다. 꿈에서 그리고 죽어가던 순간, 그가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마치 남은 내 인생에 던져진 질문과 숙제처럼 느껴졌다. 임상혁이 나에게 하려 했던 말을 세상에 전할 수 있다면 속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습관이 되어버린 멍하게 하늘 보기를 다시 시작했다. 하늘에 다양한 모양의 구름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을 하늘에 그려진 구름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박찬영을 여기서 만난 것도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이었다.
선명한 구름과 붉은 낙엽 사이로 나는 불현듯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나에게 못한 말들을 내가 그를 대신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를 사랑했던 두 남자의 이야기, 연결을 꿈꾸었지만 끝내 단절되고 파멸해버린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