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투병 중이던 나는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 책이나 읽다가 그마저도 지루할 때면 SNS에 들어갔다. SNS 속 행복한 세상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별 수 없이 치료 중반부터는 열불이 나서 SNS를 끊었다. 2년 후 치료가 끝난 때가 곧 서른이어서 한참 뒤처진 사회생활을 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내 인생에 없을 것 같았던 갑작스러운 결혼을 결혼식도 없이 혼인신고만 한 채로 시작했고 신혼 초에 남편의 개인회생까지 터지면서 자랑은커녕 조용히 살아야 하는 시절을 5년이나 보냈다. 중간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다른 엄마들은 아이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며 계속 아이 사진을 올리는 그 시절이 나에게는 전혀 즐겁지 못했고 그 후 몇 년은 재미없는 수험생활을 했으니 SNS와 나는 계속 멀어졌다.
그러다 최근 아이도 어느덧 초등학생으로 컸고 다시 글을 쓰게 되면서 여러 통로를 확장하고자 13년에 SNS를 시작했다. 자주 일상을 올리지는 않지만 가끔 들어가 보면 처음엔 이런저런 피드를 훑어가며, 또 친한 친구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재밌다가 좀 오래 보다 보면 묘한 반감이 든다. 이제 거친 파도를 맨몸으로 처맞았던 시절도 지나갔는데 왜 또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에 배알이 꼬일라고 하는 거지? 사람들은 자신이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기에 SNS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무작정 현대인의 과한 행복 자랑질 무대에 끌어올려지는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이 무대에서는 자신이 무슨 생활을 하고 있든 그게 사실이든 연기든 절대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남이 1을 자랑하면 나는 2를 자랑해야 하고 3을 자랑해 오면 4를 또 해내야 하고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덧셈을 한다. 서민은 하나씩 겨우 주거니 받거니 하고 이미 객관적인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부터는 곱셈일 뿐, 모두에게 끝없고 덧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특히 한국인들은 자기애가 지나치게 과한 사람이 아닌 이상 실제의 만남에서 자기 자랑을 잘하지 못한다. 어쩌다 한다 해도 얼굴이 시뻘게지는 걸 감수하며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라서 되려 어쩌다 누가 자랑을 한다면 다들 응원하며 박수를 쳐준다. 그러나 SNS는 고속도로라서 주춤주춤 얼굴 빨개질 틈도 없이 내달려야 한다. 싫든 좋든 다른 사람들 속도만큼 달려줘야 하고 익숙해지면 다른 차를 제치는 것도 내심 재밌다. 도로를 마구 달리며 차 안에서 쌍욕도 서슴지 않는 쓸데없이 과한 용기들이 마구 샘솟는다. 나보다 앞서 달리는 꼴도 못 보겠고 나보다 다 뒤처지면 또 재미가 없다. 딱 내가 행복하고 불행한 만큼만 타인도 그러해야 서로 유용하고 불편하지 않다.
이러한 SNS상에서의 집단적 자기애, 과한 행복 추구, 자신의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써 타인을 대하는 현상을 느낀 정유정 작가는 극단적 나르시스트를 탄생시켜 소설을 완성했다. 그동안인간의 선과 악, 욕망에 대한 심층적 탐색을 다룬 작품을 연달아 내고 있는 정유정 작가의 비교적 최신작에 속하는 이 책은 앞서 나왔던 <종의 기원>, <7년의 밤>과 맥을 같이 하는 '악(惡) 시리즈'에 들어간다. 특히 한 사람은 그냥 유전자 결함인가 싶게 미쳤고(그것이 아니기에 더 무섭다) 나머지 인물들은 그 한 사람이 공들여 짜 놓은 판 안에만들어진, 이제 스스로 만든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인 내면의 감옥에 갇힌 채 고통받는다.늘 믿고 읽었던 정유정 작가의 비교적 신간이면서도 제목이 주는 묘한 반감에 끌려 선택한 이 책은 다소 두꺼운데도 아이 학원 픽드롭 다니다 살림하는 와중에도 하루 만에 격파하게 만드는 정유정 작가의 필력은 여전하다.
p10. 엄마가 오리 먹이를 만들기 시작한 건, 지난봄 어느 날이었다. 지유가 엄마를 따라 처음 시골집에 온 날이기도 했다. 이후 네 번 더 왔다. 5월에 한 번, 여름에 두 번, 한 달 전에 한 번.
올 때마다 엄마는 오리 먹이를 만들었다. 처음엔 칼질이 서툴렀지만 이젠 선수가 됐다. 정확하고 빠르게 토막 내고, 바르고, 뜬다.(...) 엄마는 수레 운전도 잘한다.
p112.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첫 장은 7살 '지유'가 엄마 '유나'를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저 오리먹이가 오리먹이인 줄 알았을 텐데. 지유가 엄마의 진실을 알아갈수록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요망한 생쥐'를 들먹이며 순수하게도 진실에 다가가는 장면들은 그 나이대 아이들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돋보인다. 정유정 작가의 악 시리즈는 결말을 이미 알 것 같아도 작가 특유의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들과 여러 에피소드들의 탁월한 완급 조절 덕분에 스릴러장르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유나는 완전한 행복을 위해 무한한 덧셈을 하며 지치는 것을 관두고 비교적 끝을 알 수 있는 뺄셈을 선택했다. 유나와 연결된 이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도대체 무슨 계산을 해야만 했을까.
나도 8살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소설 속에서 묘사한 유나의 이미지와 비슷한 여성이 벌인 동종의 사건이 현실에 있었으니 오히려 몰입을 하게 만든다. 이런 사건 뉴스나 이런 인물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어떤 이들은 더 알고 싶지도 않다고 덮어버리지만 도대체 저런 인간은 그 많은 선택지에서 왜 최악의 선택으로 직행하고야 마는지 궁금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철저하게 취재하며 고증하고 발로 뛰는 문학을 쓰는 정유정 작가의 책을 읽을 때면 평소에 궁금해도 알기 힘든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다.
p188~9.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그대를 보내고 나서 꽃을 심었네....
서러운 마음에 꽃을 심었네...
(...) 봄방학 내내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픽업트럭에서 아버지와 함께 먹던 도시락은 그녀 안에서 꽃이 되었다. 그땐 그걸 몰랐다. 기나긴 삶의 겨울이 지나고 눈보라가 멈춘 후에야 그것이 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치거나 죽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 관찰자는 유나의 언니 '재인'으로 바뀐다. 가정환경 때문에 8살 재인은 부모님과, 7살 유나는 조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다. 부모 입장에서는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재인을 기준으로 가른 것이 합리적이겠지만 7살 유나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하고 억울하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자신만 버려진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보호체계로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기로 작정하며 유나는 폭주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부모도, 그저 부모가 한 선택에서 다른 쪽에 있던 재인도 다 죄인이라서 유나의 아슬아슬한 행보를 막지 못한다.
유나는 뇌 구조부터 타고난 사이코패스가 아닌 환경요인으로 만들어진 소시오패스이자극단적 나르시스트다.나르시스트가 다 소시오패스인 것은 아니지만 소시오패스는 다 나르시스트다. 나중에라도 유나를 적극적으로 더 사랑해 줬으면, 이야기 속에 오은영 박사님이 있었다면 유나가 악인이 되지 않았을까? 유나의 이상 행동을 밝히고 정신과 치료를 하는 것은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라 그냥 참고 견디는 한국인 종특에 따른 비극적 결과인 걸까? 사실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에 비해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에 그 기질이 심화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이 있을 뿐 시기를 놓치면 사이코패스만큼이나 사후 치료는 행동 치료 정도나 가능하고 그 효과도 미비하다. 유나가 그 기질이 발현된 것은 이미 7살이고 가족들은 그저 죄인 된 심정으로 막연하게 감당했을 뿐 적극적인 조치는 없었기 때문에 그 기질로 쭉 자라 버린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만들어진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
재인은 장교였던 아버지가 퇴역 후 허름한 사업체를 겨우 운영해 가며 우울증인 어머니와 미친년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동생 유나까지 건사하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자신이라도 착하고 성실하고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큰 딸이어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살아간다. 여기저기 실없는 웃음을 던지고 무시당해도 계속 운전 중에 주문처럼 흥얼거리던 아버지의 노래는 아버지가 싸온 차디찬 도시락을 나눠 먹을 때 재인의 목구멍을 통해 넘어가 가슴 깊이 박혔다. 그 노래가 집안에 짙게 깔린 어둠에 잠식되지 않도록, 유나의 악랄함에 황폐해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재인이 유나에게 속수무책이도록 만드는, 아버지가 '너라도 꽃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요한 올가미였음을 점점 알게 된다.
p256. 지금껏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자기 꼬리를 외면하는 개와 다름없이. 삶의 행로는 꼬리만큼 길고 분명한 것이었다. 꼬리를 자른다 하여 사라지지도 않는다. 양쪽 엉덩이 사이에 꼬리가 있었다는 걸 적어도 한 사람은 기억할 테니까. 바로 자신은.
p269. - 왜 전화를 안 받아. 답답하게. 지금 어디 있어? 아직도 병원이야? -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문자였다. 아내가 가출할 때마다 그가 보내던 문자와 똑같았다. 그때 아내가 어떤 기분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을지, 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감정적 우위를 점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마음껏 두드릴 수 있는 키보드 앞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문장으로 바꾸자면 이제 슬슬 조져볼까, 정도가 될까.
마지막 관찰자는 유나의 새 남편 '은호'다. 유나의 전 남편 '준영'이 사라지자 자신의 오빠를 찾느라 혈안이 된 준영의 여동생 '민영'은 어떻게 알고 연락한 건지 은호에게 만나자고 한다. 9년 만에 떡하니 재인 앞에 나타나 사람을 탈탈 털더니 이제는 은호다. 민영은 은호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새 언니 취향을 알겠네요."
다들 뒤에서나 수군거릴 그런 말을 민영은 거침없이 내뱉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민영은 세상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만 돌아가는 유나와 같은 과다. 적당한 키, 적당한 외모, 적당히 소심한 성격까지 자신의 오빠와 많이 닮은 은호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유나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관적으로 유지한 기준이다. 웃기게도 은호가 물불 가리지 않는 또 다른 나르시스트 민영을 잘 활용한 덕분에 사건 해결이 빠르게 진행된다.
은호는 '준영'의 실종을 비롯한 유나의 주변 인물들의 사건들을 되짚어보고 흩어져있던 퍼즐을 맞추어 가면서 자신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나로부터 훈련되고 조종되어 왔는지 새삼 알게 된다. 전처와 이혼 후 친구 '진우'와 불현듯 떠난 러시아 횡단 여행에서 첫 만남부터 유나에게 꽂혔고 훅 빠져 결혼할 때까지는 참 행복했는데 그 후 일상은 영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무리 싸한 느낌이 들어도 또 이혼할 수는 없다는 은호의 기준과 유나의 행복을 위한 기준이 톱니바퀴처럼 맞붙어 파멸로 향해갔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유나와 자신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행복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애초에 달랐다는 것도 알았지만 언제나 외면했던 은호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서야 드디어 각성한다. 유나에게 은호의 각성은 비교적 쉬웠던 준영에 비해 다소 당혹스럽고 예기치 못한 변수가 된다. 자신의 냉철한 행보에 철저한 '갑'이었던 유나가 자신이 늘 해오던'을'의 작태를 보이자 은호는 비릿한 희열을 느낀다.
p294. 참으로 경이로운 아이였다. 어쩌면 저리도 자기 눈동자를 손가락처럼 다룰 수 있는지. 얼음장 같았다가, 칼날 같았다가, 별빛 같았다가, 봄 햇살 같았다가. 지금은 앵무새를 발견한 고양이 같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재인은 유나와 더 이상 피할 길 없는 정면 승부의 장으로 들어선다. 모든 진실을 다 알았음에도 유나의 말과 표정과 몸짓에 여전히 혼란스럽고 여전히 태연 작약한 유나가 두렵다. 유나의 대학교 동창이자 은호의 절친인 '진우'의 눈에도 유나는 늘 튀는 소문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은호와 함께 간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유나에게 특유의 넉살로 파고들어 같이 술 한잔을 하기에 이른다.뭐든 간과하는 법이 없는 진우는 대학교 시절의 한 사건으로부터 유나를 의심해 왔기에 뭔가를 알고자 술자리를 만들었다. 책 속에서도 어떤 유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라고 말한다. 다부지고 건장한 체격에 유들유들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선함에 대한 추구가 분명한 진우는 재인과 은호를 비롯한 유나를 거쳐간 다른 이들이 오랜 세월 유나를 의심할 줄 몰랐던 것과 달리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유나를 의심할 줄 알았다.진우는 세월이 지난 뒤 은호가 유나와 결혼한다고 할 때 오해받을 걸 감수해서라도 말렸다면 은호가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라며 자책한다.
하지만 진우는 은호를 바보천치 취급할 수가 없다. 진우의 눈에도 유나는 누구나 첫눈에 반할 만하고 사랑에 빠질 만해 보였으니까. 특히 사랑이라는 껍질 안에서 상대방이 천사와 악마를 숱하게 오갈 때는 천사처럼 굴던 그 달콤함만을 애써 더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껍질을 깨부수고 나오기가 더 어렵다. 오랜 세월 가스라이팅을 당해도 그게 가스라이팅인지도 모르고 당하는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나르시스트는 자신의 모든 것들이 드라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섣부르게 굴다가 일을 그르치지 않는다. 피해자 자신이 어느새 그 드라마 속에 합류한 지도 모를 만큼 교묘하다. '어휴 바보들, 그걸 왜 당하나. 딱 느낌 오지 안 오나'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미 누군가의 드라마에서 제쳐질 인간 3,4 정도에 위치해 있을지도 모른다. 제쳐진다는 것이 꼭 살인만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기애가 있다. 여러 예능 채널에서도 그런 나르시스트적인 모습을 개그 소재로 많이 쓴다. 그만큼 경중의 차이가 있긴 해도 흔하게 보는 게 나르시스트다. 나르시스트들은 대체로 매력적이며 언변이 좋고 수완이 좋기에 사람들이 알아서 꼬이는 편이다.친구랍시고 조언이라 하지만 비난 일색이다가 교묘하게 한 번씩은 인정을 베푸는 사람, 찍는 사진마다 자신이 늘 가운데에 있어야 하거나 지인들은 그저 배경이거나 자신의 삶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인 사람, 먼저 다가와 친하게 지내자 해놓고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멀어지더니 다시 뻔뻔하게 다가오기를 반복하는 사람, 나는 되고 너는 안 되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너무 쉽게 되는 사람 등 주변에 나르시스트는 생각보다 매우 많다. 특히 요즘 세상은 너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는 핑계를 잡고 너무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자신만을 중시 여기고 지키도록 강조하며 아이의 시야를 가리는 듯한 모든 것들을 다 가지 쳐주며 나르시스트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 아이는 점점 커가면서 부모가 했던 그 가지치기를 자기가 거침없이 해도 된다고 믿고 행동하게 된다.
앞서 나온 <종의 기원>, <7년의 밤>들의 서사의 볼륨감이 너무 풍부했기 때문에 그에 비해 <완전한 행복>은 볼륨감이 살짝 죽은 듯한 아쉬움이 있고 발간연도가 2021년인데 그 바로 1년 전 뉴스를 떠들썩하게 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점에서 몰입이 방해된다는 괜한 비판적인 리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사건의 외형 하나만 유사할 뿐이고 앞서 말했듯 읽을수록 한 명의 독보적인 미친 인간 말고 그와 엮여 있는 주변에 있을 법한, 어쩌면 자신을 닮은 사람들의 내면을 보는 재미가 훨씬 크다. 자신 또는 주변 누군가가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높은 줄 알았는데 혹시 나르시스트는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스릴러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