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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T맘 Nov 02. 2024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가볍다가 무겁다가 왔다갔다


 소싯적 책을 많이 읽었지만 상당 수의 책은 분명 읽었으나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떤 때는 주제나 결말 같은 치명적인 것이 기억나지 않고 어렴풋이 느낌만 남은 책들도 수두룩하다. 그럴 때면 약간 안타깝지만 인생 평균길이의 중간 정도에 와 보니 결과와 과정은 의외로 동급이고 사실보다는 느낌이 더 중요할 때가 많아서 괜찮다. 독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상당 수의 책 속의 내용이나 인물, 심지어 결말을 까먹었을지라도 그 많은 책들을 읽으며 사색을 통해 내면이나 두뇌를 자극하며 분명히 어떻게든 성장했을 것이다. 단, 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책들만큼은 허무하게 기억 저편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고 남겨두는 게 좋기에 스테디셀러 서평 연재를 하는 중이다. 읽은 모든 책이 다 유의미할 수는 없다. 또 그 유의미함에 집착하게 되면 책을 읽는 흥미를 잃어서 되려 책과 멀어지기도 한다. 우리들의 삶도 사는 동안 일어난 모든 사건과 경험이 죄다 의미로 꽉 차 있다면 인생이 너무나 무거워서 견딜 수 없다. 삶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매사 엄중하고 진지하고 보다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삶의 본질을 모르는 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그 기구한 팔자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큰 힘은 그 숱한 책들과 가끔씩 폭발하듯이 써 내려간 글과 언젠가는 책을 내리라는 출판의 꿈을 놓지 않았던 게 컸다. 그냥 이 말을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울컥 눈물이 솟을 만큼 엄청 진심이다. 책과 글쓰기는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뭔가를 붙잡고 의지할 것도 딱히 없어서 일부러 무감동하고 남의 이야기에 관심 없이 살아온 내가 유일하게 정과 생각을 쏟아내고 책 속의 말들을 편견없이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생각을 나눈 진정한 벗이었다. 그래서 내 감정과 의식이 닮아있는 책을 읽고 나면 그 여파가 하도 커서 한 동안 몽롱하기도 했다. 얼마 전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이 내 감정선을 닮아있다면 오늘 이야기 나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삶에 대한 인식 면에서 많은 공감을 했던 책이다.



 밀란 쿤데라는 체코의 기품 있는 음악가 집안의 자녀로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냥 그렇게만 살았다면 이러한 역작을 낼 수 없었을 텐데 다행히도(?) '프라하의 봄'으로 불려지는 체코의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쫓겨나듯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런 정치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완성했다.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두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모순적 존재인 인간의 사랑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귀결을 잘 이끌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간적 배열이 즉흥적이고 독특한 데다가 사회주의와 선동정치문화에 대한 비판과 풍자, 니체의 영원회귀설 등의 철학까지 다 담았음에도 전혀 따로 놀지 않는 점도 감탄할 만한 부분이다. 특히 2018년도에 민음사에서 재발간된 책은 감성적인 회베이지 배경에 알록달록한 불어 필기체, 주인공들의 사랑스러운 개 '카레닌'을 심플하게 그려 넣은 표지가 무척 예뻐서 소장용 또는 선물용으로도 매우 좋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 교보문고




 p17.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생에도 리허설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재차 반복하면 대체로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한다. 자꾸 달리다 보면 빨라지고 계속 도전하면 성공한다. 점점 좋아지는 걸 느끼다보면 인생이 한 번 뿐이라 아쉽다. 다시 태어나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다시 태어나면 사람한테 상처 안 받아야지 하며 다시 살 수만 있다면 당연히 바보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에서 니체의 영원회귀설을 핵심적으로 인용하며 그와 같은 생각이 대단한 착각임을 깨닫게 한다. 니체는 다시 태어나봤자 현생에서 하는 모든 선택과 과정, 그 결과까지도 고스란히 반복된다고 보았다. 그러니 인생이 한 번 뿐이라 아쉬울 것도 전혀 없으며 그냥 지금 실존하는 순간에 몰입하고 살 것을 강조한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고 싶게끔 주체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p463.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일생 동안 모순 없이 행복하게 살다 간 존재는 그 많은 주인공들을 제치고 단연 주인공들이 키운 개 '카레닌'이었다. 혹시 재발간 표지 디자인이 딱 심플하게 카레닌 하나만 그려놓은 이유가 우리 인간들이 개만도 못한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의도였을까? 늘 궁금하던 그 질문에 이토록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물론 추상적으로 노상 떠드는 말들은 있다. 이를 테면

 '에휴 부럽다 그저 주는 밥 먹고 놀다 잠자고 그게 다인데 얼마나 좋아 아무 걱정도 없지.' 

 '개들은 그저 매일 주인이 돌아오고 매일 공을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바라는 게 없지'

 그렇게 그들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복에 만족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렴풋이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왜 인간은 개처럼 매일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산책하고 때마다 가끔은 놀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함께 하는 것에 만족하고 행복할 줄 모를까?

 


 개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 있다.

 "휴먼, 내가 몇 년 째 이 집인게 좀 지루해져서 말이야. 옆집 아무개는 이사가니까 너무 좋다더군? 계속 이 집에서 살다 죽으라는 건 아니지?"

 인간은 어떤 성취를 반복하는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이 성취되면 또 다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면 또 앞으로 나아가려고 다른 것을 추구한다. 직선의 삶은 지난 연재 정유정 <완전한 행복> 편에서 말한 행복을 위한 무한한 덧셈과 일맥 상통한 형태이다. 그래서 지병이든 뭐든 어떤 사유로 직선의 삶이 다소 어려워진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렸다가 개를 키우고부터 다시 활력을 찾는 이유는 개들을 통해 행복이 직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때문이다. 아무런 비극의 경험 없이 줄곧 직선의 삶을 걸어가는 이들은 진정한 행복이란 그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반복될 수 있는 것에 의구심 없이 만족하는 것임을 알기 어렵다. 이제 우리가 왜 개만도 못 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p57.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p80.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사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p431. 죽은 프란츠는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마침내 법적 부인의 손안에 들어갔다. 마리클로드는 장례식을 준비하고 부고장을 발송하고 화환을 주문하고 따지고 보면 웨딩드레스 격인 검은 드레스를 해 입는 등 모든 것을 결정했다.(...) 부인에게는 남편의 장례식이 결국 그녀의 진정한 결혼식이었다.



 

  사랑의 필수 조건인 가볍기 짝이 없는 '우연'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남편과 나는 소개팅으로 만나 두 달의 연애가 전부였고 바로 결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남편과 나 사이에는 '우연'을 말할 수없다. 단지 '누가 나 같은 여자를 견딜 것이며 누가 너 같은 남자를 견딜 것인가'의 면에서 서로 '운명'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애사도 그 우연을 설명할 만한 관계가 거의 없었고 단 한 명의 과거 남자친구 한 명만 그런 우연을 설명할 수 있어서 소환해보려고 한다.



 내가 24살인가 25살인가 하여간 그때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지하철에서 나와 버스로 환승하려고 개찰구로 가는 중에 의경 세 명이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중에 유독 강렬한 눈빛을 가진 놈 하나가 눈에 띄는 거다. 아 저 눈깔 저거 어디서 봤는데 하는 중에 이 녀석도 나를 계속 보면서 다가온다. 나도 홀린 듯 다가간다. 서로 가까워지는 순간 이 녀석이 먼저 환하게 웃고 나도 덩달아 환하게 웃었다.

 "누나! 어떻게 여기서 봐요? 너무 신기하네."

  그 녀석은 전 남자 친구의 동아리 후배였다. 그때 당시 오래 사귄 전 남자 친구가 헤어지자 다시 만날래 반복하다 끝내다른 여자 생겼다해서 얼이 빠져서 오직 바쁜 아르바이트를 해대며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때였다. 알던 동생이라 한눈에 반해 웃은 건 절대 아니었다. 친한 편이었지만 한 동안 얼굴 볼 일이 없던 녀석이고 서로 학교든 사는 곳이든 그 무엇도 가까운 것이 없어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그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다고 그렇게 오래간만에 환하게 웃을 일이기까지 한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도 그 녀석이 먼저? 입대 중이라 아직 전 남자 친구와 내가 헤어진 걸 몰랐던 상황이라 어떻게 보면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다가올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렇게 웃어버렸고 마치 한눈에 반한 것처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의경이라 휴대폰 사용도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분위기여서 시간만 잘 맞추면 일상에서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워낙 지치도록 바쁘고 서두에 말한 대로 뭔가에 집착하는 거 자체를 온몸의 피가 거부하는 여자라 왜 전화 안 받아 왜 문자 답 안 해 그런 거에 질려해서 그렇게 간간이 하는 그 아이와의 연락이 부담 없고 좋았다. 그러다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이 만났다. 처음에는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던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그 녀석과 '그 씨발 놈이, 그 형 진짜 최악이네요' 합주곡을 하면서 둘 다 맥주를 좋아해 공원에서 맥주나 마시며 놀았을 뿐이다. 그러다 점점 다양한 장소들을 같이 다녔다. 누나 이번 주는 어디 가요, 야 이번 주는 어디 가자 하면서. 왜 이렇게 그 녀석이랑 놀면 세상 즐겁고 좋은지,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그 녀석의 강렬한 눈빛과 환한 웃음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든 흐름이 자연스럽고 경쾌해서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건 너무 당연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 아이의 눈빛은 그냥 원래 좀 그렇다. 뭐든지 독특한 구석이 많았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나랑 잘 맞았을 뿐이고.



 시작은 그렇게 드라마틱했지만 사귄 지 3년 가까이 되던 어느 날 나는 치료해도 별 가망이 없다는 날벼락을 맞았다. 지금은 쉽게 고치는 병인데 그때는 전국에 전문의도 4명뿐이고 치료제도 표적치료제도 아닌 신장암 환자들의 항암주사제로 부수적 효과를 바라보며 막연한 치료를 하는 게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대뜸 간 이식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하여 동주민센터가 주춤거리는 엄마 대신 아빠에게 연락을 돌릴 정도로 절박하고 기구했다. 그 녀석은 헤어지자는 나를 무시하고 병원에 노상 왔다. 날로 변해가는 내 모습도 사랑해 줬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저 헤어지자는 말만 앵무새처럼 떠드는 내게 지쳐갔고 결국 어느 날은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헤어져줬다. 난 2년간의 치료가 기적적으로 끝난 후 가장 먼저 그 녀석에게 연락했지만 관계를 돌이킬 수 없었다. 열정적으로 사랑을 쏟은 사람은 냉정하게 돌아선다는 것을 그때 그 녀석을 통해 배웠다.



 우연은 그저 우연일 뿐이고 대단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것인가? 하지만 다들 돌아보아라. 당신들도 강렬하게 기억하는 사랑은 분명 우연이라는 메서드가 있을 것이다. 사랑뿐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기회들도 우연한 일로 시작되는 것들이 많다. 사랑이든 일이든 우연이 계기가 된 것들만 강렬하게 기억되고 많은 의미가 부여된다. 차근차근 준비되고 당연한 수순이었던 일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나도 그 적지 않은 여러 연애사 중에 다른 연애들은 다 부질없고 의미 없게 느껴지는데 지금 결혼생활을 하는 중에도 유의미했던 사랑은 과거의 그 녀석과 지금의 남편 단 두 명뿐이다. 나란히 놓는 게 좀 걸쩍지근해서 하는 말인데 우연이 우연으로 끝난 것과 운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른 것이니까 그 녀석과 남편이 절대 동급은 아님을 말해두겠다. 밀란 쿤데라는 우연이 우연에 몰입하며 필연이라 여기는 것이 사랑임을 토마시와 테레자가 여섯 번의 우연을 통해 이루어지고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랑의 일대기로 보여준다.



 그런 이유로 우연적인 강렬한 사랑 없이 차근차근하고 미적지근했던 마르클로드와 프란츠의 결혼생활은 행복하기 어려웠다. 결혼생활은 오랜 세월 함께 비비고 사는 것이라 강렬한 사랑이 세월이 지나며 아무리 변한다 해도 일단은 그 불씨는 남아있어야 계속 따뜻한 온기를 살릴 수 있다. 애초에 남겨질 불씨조차 없던 둘의 관계는 아주 오래도록 매우 차갑게 이어졌다. 심지어 낭만주의자인 프란츠가 사랑은 둘째치고 인간적으로도 좋아할 수 없는 속물적인 마리클로드와 그녀를 빼닮은 그 들의 딸은 한 묶음으로 그저 처치곤란이었다. 잘했거나 못했거나 프란츠가 사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떠난 후 세월이 지나 또 다른 젊은 여성을 사랑한 것은 인간이 우연에 몰입하고 필연이라 여기는 사랑의 기본 설정값에 따르자면 당연한 결과였다. 프란츠는 위험천만했던 반사회주의 지식인 운동에서도 살아남아 놓고 어이없게 그저 골목 깡패에게 뒤통수를 가격 당하여 사망해 버린다. 그의 죽음 역시 너무가 어이없어서 가볍기만 하다.



 그런 가벼운 죽음에 이르러서야 부인 마리클로드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의 장례식은 마리클로드가 온갖 준비를 토대로 완벽하게 치러낸다. 조문객들은 그녀의 기품 있는 자태와 완벽한 장례식을 보면서 프란츠와 마리클로드의 평생의 사랑을 높게 사지만 사실 사랑도 없다시피였던 텅 빈 결혼생활의 진실은 마리클로드가 조문객들이 다 돌아간 텅 빈 집에서 무겁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녀가 조문객들 사이에서 자신의 완벽한 남편의 장례식을 치뤄내기 위해 눈물도 별로 없이 몰입하는 동안 조문객으로 멀찌감치 다녀간 프란츠의 마지막 젊은 애인이야말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울다가 주변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장면은 가볍다고 치부된 애인은 오히려 프란츠의 죽음에 한없이 무거워지고 대외적으로 무겁게 인정된 법적 부인에게 프란츠의 죽음은 다소 가뿐하게 느껴진다. 사실 마리클로드는 그 장례식을 통해 자기 일생의 모든 짐과 사랑받지 못했던 비참함으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 이제는 그저 미망인으로서의 우아함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p164. "(...) 무수한 저작물, 문장의 눈사태, 양의 광적인 팽창 속에서 정작 문화는 실종되지. 당신 나라에서 금서가 된 단 한 권의 책이 우리네 대학들이 토해 낸 단어 수억 개보다 훨씬 의미 있어."

p177.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실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은밀한 삶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276.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p414. 그들은 그들의 깃발이 피의 세례를 받아 성스러워졌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미처 몰랐던 묘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기점으로 그전과 후의 작품 색이 완전히 달라진다. 인간의 삶이 존재, 사랑, 정치가 주요 골자이기 때문에 이 책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치적 경험이 녹아들었을 뿐 이 책을 정치적인 소설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정치적 내용이 일부라고 하기에는 그 풍자들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정치적 성격이 강하게 보이는 면이 있다. 이후의 작품들은 정치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에로틱한 설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본능을 주로 다뤘다. 아마도 프랑스에 망명하여 오래 사는 동안 자연스럽게 작품의 성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자신은 작가이기 때문에 경험하고 사유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낼 뿐 정치적이거나 반체제적인 작가로 국한되지 않음을 강조해 왔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자신의 대학에 지리멸렬하게 쌓여있는 책들보다 사비나의 고국 체코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 하나의 가치가 훨씬 크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이상을 실현하고자 베트남의 캄보디아 지원을 촉구하는 지식인들의 민주화 행진에 참여했을 때 지뢰를 밟고 터져죽는 이의 피가 그 행진을 극적으로 보이게 해주는 이벤트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자신이 추구한 이상도 집단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하면 그저 키치적인 선동 문화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비나는 그 어떤 체제나 사상도 신봉하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사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전시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정치적인 왜곡이 스민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개인의 전시가 성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굳이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 것보다는 자신의 커다란 작품 뒤에서 누가 볼지 안 볼지 모를 섹스를 하면 어떨지에 대한 상상이 다른 생각들을 압도한다. 군중을 의식하는 순간 어느 방향으로 행동하든 그것은 가식을 동반한다고 간주한다.



 국가나 신념을 위해 희생된 이들이 묻힌 공동묘지에서 프란츠가 벅차오르는 경외감을 느끼는 동안 그저 조용하게 다들 묻힌 그 평화로움만이 좋을 뿐이다. 프란츠가 자신에게 너무 무거운 가정에 안착할 수 없고 가벼운 연애를 추구한 것도 가정생활에서 느낀 무력감의 영향도 있었듯이 사비나는 위기의 사회 속에 아무것도 해낼 자신이 없는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에 의해 한없이 가볍고 탐미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p284.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 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은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던 명예에 각별한 특권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는 데에 익숙했다.



 

 토마시는 외과의사로서 명예롭게 살던 어느 날, 반사회적인 기사를 쓰는 바람에 병원과 정부부터 그 글을 철회할 것을 강요받는다. 철회를 하든 말든 잃을 것 없는 작자들에게는 철회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선택을 한다면 잃을 것이 너무 많은 이들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철회다. 어떤 체제든 정복을 위해서 명망 높은 이들을 자신들의 체제에 섭렵함으로써 별 볼 일 없는 대중들을 쉽게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명예로운 의사생활을 지킬 수도 있고 바로 한 순간에 자신이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삶을 살 수도 있다.



 그의 선택이 어느 쪽이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작가는 토마시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토마시만큼이나 주목하는 주변인들에 초점을 둔다. 토마시가 철회를 선택한다면 체제에 굴복하고 살아온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고수를 선택한다면 체제에 대항하고 모든 명예와 부를 포기한 자들에게 위로가 될 것이었다. 토마시는 고민 끝에 고수를 선택함으로써 테레자와 함께 점점 도시와 멀어진 생활로 깊게 들어간다. 처음에는 건물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외진 시골 깊숙한 곳으로 가서 정비사로 살게 된다. 테레자는 그 모든 결정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죄스럽지만 토마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이고 선택이었기에 진심으로 후회하지 않고 과거의 삶에 미련도 없다.



 이 책에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4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마시를 제외한 3명의 인물들은 극단적인 한 면만을 가졌다. 테레자와 사비나는 사랑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조적 인물이고 프란츠는 이상주의자이다. 토마시는 여성에 대한 호기심을 멈추지 못하는 가벼움과 평생 테레자를 지켜주고 사랑하는 굳건한 무거움을 동시에 가졌다. 프란츠가 이상주의자지만 행동에 소극적이었기에 결혼생활도 정치적인 면모도 애매함으로 점철된 반면 토마시는 첫 결혼생활도 사랑하지 않음에 질질 끌지 않고 단절했으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굴복시키지 않음으로써 모든 부와 명예를 내던지며 진정으로 행동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지녔다. 하지만 그는 존재와 사랑과 정치의 양면성이 늘 어려웠고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자신만의 기준을 잡고 제법 튼튼하게 살아가는 토마시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한 철학을 보여주는 핵심인물이다.  




p375.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사람들은 이런 대립이 얼마나 서로 교체 가능한지를, 인간 존재에 있어서 양극단 간의 폭이 얼마나 좁은 지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p376. 스탈린의 아들은 똥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똥을 위해 죽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해 생명을 바친 독일인들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 그렇다, 이들은 멍청한 짓을 위해 죽었고, 그들의 죽음은 의미도 없고 보편적 결과도 낳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 아들의 죽음은 전쟁의 광범위한 바보짓 중 유일한 형이상학적 죽음이었다.




 스탈린에게는 두 명의 처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첫 번째 아내와 고명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잠시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시절이 있었지만 아들들에게는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특히 첫 번째 아내 슬하의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스탈린의 본 성. 스탈린은 스스로 만든 성이다.)와는 자신과 달리 조금은 유약하고 조금은 정상적인 면이 있다는 이유로 평생 척을 지고 살았다. 스탈린 같은 사람이 자신과 6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새어머니와의 생활에 부적응하고 이복동생들과의 차별에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듬어줄 리 만무했다. 스탈린은 두 번째 부인 슬하의 차남이자 하도 개차반이어서 스탈린 사후에 정계에서 추방당할 정도였던 차남 바실리 스탈린에게는 평생 사고 치는 걸 막아줘 가며 사랑을 주었다. 학교에서 허구한 날 사고치 던 바실리를 엄하게 꾸짖어 달라고 해놓고선 정말 엄하게 지도하던 교사들을 다 죽여버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장남 야코프는 1941년 독일-소련 전쟁에서 차남 바실리와 달리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독일군에게 잡혔지만 아버지 스탈린은 그를 구하려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야코프가 작센하우젠 포로수용소에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각종 썰이 난무하여 사살인지 자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미움을 받았든 어쨌든 스탈린의 장남이었기에 쉽게 사살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고 그의 출신 때문에 특급포로로서 처음에는 나치로 전향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차남은 전쟁통에서 싹 빠져나갔는데 장남은 수용소에 잡혀버리다니. 그야말로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의 대립의 폭이 갑자기 확 줄어들어 거의 붙어버리는 상황이다.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의 반목을 거듭하다 권총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적이 있던 야코프가 동생 바실리와 달리 전장에 내던져지고 포로로 잡혀간 마당에도 자신이 나치에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로부터 관심받지 못하자 드디어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국 또 한 번 자살을 시도하고 기필코 성공한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작품 속에서는 야코프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올 때면 다른 수감자들이 너무나 지저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하여 허구한 날 교도관들에게 혼났다고 설정했다. 아무리 주의를 줘도 야코프는 절대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고 여기저기 똥으로 난도질을 했다.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개인적 차원의 저항이다. 국가의 영토확장이나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오히려 무의미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스탈린의 아들의 썰을 가져와 흥미롭게 풀어냈다. 정과 부정 어느 면으로도 평가할 만한 내용이 넘쳐나는 스탈린과 달리 별 업적도 없이 쓰레기였고 좀 덜 쓰레기였던 그들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알 일이 없었는데 이 책을 보다가 정말 똥칠하다가 자살한 건지 궁금해서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야코프의 죽음이 작가의 말처럼 개인적인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저항이었는지 진실에 대해서는 죽은 야코프만이 일이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 종종 나오는 책 제목이기도 할 만큼 스테디셀러이자 명작임은 확실하다. 그중에는 막말로 폼 잡기 좋은 책이어서 읽은 사람들도 꽤 있는 걸로 안다. '도대체 그놈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도대체 뭔데 다들 그게 인상 깊다는 거야?' 하면서. 독서는 진정으로 하는 게 제일이겠지만 폼 잡을라고 하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다. 앞서 발표했던 <농담>이 사회주의에 대한 풍자가 주된 내용이었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한 인간의 인생이 한 번 뿐이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역사도 후 세대로부터 무거움을 부여받았을 뿐 모든 흐름과 선택은 우연 천지에 엉망진창이었다가 평화롭기를 반복했다. 역사는 지극히 가벼운 선택들의 기록이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가벼운 선택들의 결과는 참담하거나 거룩했다는 것이다. 또한 삶과 사랑에서의 모든 선택과 과정도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함으로써 모순될 수밖에 없음을 통찰한 역작이다. 왜 그런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특히 가을 날씨에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이라 더욱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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