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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T맘 Nov 16. 2024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철학과 기차의 환상적인 궁합


 최근 대수능이 끝났다. 학원 강사였을 때는 수능날짜부터 체크하곤 했는데 이제는 수능날짜가 나에게 아무런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그래도 그 많은 아이들이 그날 얼마나 긴장하고 하루를 보냈을지 엄마같은 걱정이 얄팍하게 깔린다. 나도 겪어봤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대수능. 우리 때와는 다르게 수시 비율이 훨씬 높다지만 대수능은 대수능이다. 올해 대수능의 실제 응시 인원은 444,870명으로 집계됐다. 어떤 결과든 너무나 고생했고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끔찍한 생각 같은 절대 하지 말고 전략 짜기에 만전을 기하고 운도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때와는 다르게 새로운 학과도 많이 생겼다는데 신설과 들까지 통틀어서 기꺼이 철학과를 선택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일단 철학을 재밌어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나같이 철학을 재밌어하는 사람이라도 학과를 다니는 동안은 빠져 들이 팔 자신은 있는데 졸업 거냐는 질문에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혜로운 삶을 이야기해주는 유명 강사? 것도 좋긴 하다. 허나 딸이 12년 후에 수능을 치르고서 어느 학교든 철학과를 간다고 하면 솔직히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다른 과를 선택하길 바랄 같다. 아주 오래전에는 철학을 선택하는 순간 보장된 삶이었는데 이제는 철학이나 인문보다는 과학, 기술, 예능을 선택해야 그나보장된다.



 철학이 이토록 외면받는 듯하지만 살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은 필요하다. 매일을 썩 괜찮게 보내는 것은 할만하지만 그 매일이 모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다면 대답하기 쉬운 사람은 별로 없다. 철학은 진로보다는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14명의 철학자들의 테마에 맞는 장소로 기차여행을 다니며 그들의 사상을 작가가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을 곁들여 아주 쉽게 수다처럼 이야기해 준다. 철학과 비행기? 철학과 버스? 철학과 지하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어쩐지 잘 안 어울리는데 철학과 기차는 참 잘 어울린다. 에릭 와이너가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택한 다소 느린 기차 덕분에 이야기는 풍성해졌고 우리는 빠른 시간 안에 여러 철학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 교보문고




p12. 어떻게. 요즘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단어다. 어떻게를 알려주는 실용서는 출판계의 망신거리로, 마치 크게 성공했지만 무례한 사촌과 비슷하다. 진지한 작가들은 실용서를 쓰지 않고, 진지한 독자들은 실용서를 읽지 않는다.(...) 우리를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를 묻는 질문이다.

p17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어떻게. 앞에 오는 목적어가 인생이 아닌 '주식을 어떻게 해야 수익을 있는가', '5급 행정고시 공부어떻게 해합격할 수 있는가', 이런 류의 질문이라면 '어떻게'는 전혀 심오하지 않은 방법론이다. 주식으로 수익을 냈고 5급 행정고시최종합격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설파할 있다. 그보다 명실공히 부자가 됐고 명예를 얻은 사람이 자신들의 성공신화를 풀어낸 자기 계발서나 실용서들의 성공은 더욱 보장된다. 심지어 개인의 삶을 담은 기록조차도 무슨 위인전처럼 팔린다. 그런 책을 내겠다고 한 출판사도 책을 사 읽는 독자들도 책을 쓰는 성공한 자들에게 문학이나 철학을 원하지 않는다. 집안에서 가장 성공한 삼촌이나 고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때 그들이 용돈은 많이 주기 때문에 참고 듣는 잔소리나 참견 같은 책이다. 그 삼촌이나 고모와 진정한 대화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나 실용서를 읽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걸 그대로 '따라 한다고'해서 그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찌 보면 성공신화를 설파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은 그 분야의 진리를 얻은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철학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진리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관점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진리를 얻은 것이 맞지만 그들을 '따라한'자들은 자기만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얻기 어렵다. 단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정말 모든 걸 다 따라 한다면 체득된 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기에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있다. 그들이 말하는 '어떻게'는 앞서 말한 주식이나 행정고시 앞에 붙은 '어떻게'보다는 수준 높긴 하지만 여전히 심오한 경지는 아니다.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처럼 '어떻게' 앞에 인생이라는 커다란 녀석이 와버리면 성공한 사람이고 못한 사람이 고간에  심오함에 기가 눌린다.



 쇼펜하우어는 경험하고 생각하는 틈 없이 노상 책을 끼고 있는 것보다 지식이 고갈됐을 때 책을 읽는 것이 현명하다고 했다. 수많은 책을 읽어 해치우고 방대한 정보를 검색하여 다 복사하여 붙여두었다 해도 그 작업으로 끝이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게 나을 정도다. 지식과 정보들은 필요한 부분이 색출되고 내용에 맞게 구분된 후 하위 목차가 만들어지는 편집까지 이루어져야 비로소 유의미하다. 그다음은 자기 생각의 시간이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본인이 한 경험이나 세운 가설이 지금까지 편집한 정보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만약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따져보고 일치하지 않는 쪽의 정보들 또한 앞서 말한 과정을 모두 거쳐서 유의미한 정보를 구축한 후 생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시대를 풍미한 헤겔 등 주요 기성 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철철 넘치는 자신감은 방대한 지식을 다양한 측면으로 수집하여 분석하고 정리하고 끊임없이 고찰했기에 가능했다. 요즘 AI가 소설도 써내고 인간이 고찰하거나 통찰하는 시간을 단축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유용함과 동시에 꽤 위험할 수 있다.




p51. 학자들은 변증법, 엘렌쿠스(elenchus), 귀납적 추론 등 여러 멋진 용어를 이용해서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나는 더 단순한 용어를 선호한다. 바로 대화다. 이 단어가 그리 고급스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 내게 노벨상을 낚아채주지도 않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건 맞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현대 철학자 로버트 솔로몬은 이를 "현명한 훈수질"이라고 부른다. 마음에 든다. 이 표현은 철학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동시에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처음 이 책을 보자마자 왜 책 제목에 그 많은 철학자들을 제치고 소크라테스를 붙여지었을지 궁금했다. 서양근대철학의 빅스타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있는데 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일까? 단지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아버지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추론을 해봤다. 에릭 와이너는 한창 사춘기인 딸 소냐와 함께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테마에 맞는 장소로 기차여행을 다니며 책을 썼다. 능수능란한 아빠들도 사춘기인 딸과 단둘이 하는 여행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그저 보통의 아빠인 에릭 와이너가 이 기막힌 여행을 강행한 용기에 일단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미 여행의 시작부터가 시장통이든 정치 단상이든 발길 닿는 대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대화하고 그 대상에게 비난과 멸시를 받아도 개의치 않았던 소크라테스를 닮아있다. 여행 중 딸 소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가끔 풍기는 뉘앙스는 역시나 녹록지 않았고 때로는 간당간당했기에 읽는 내내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제발 이 여행의 끝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랐다.


 

 14명의 철학자들의 본국과 주활동지가 다 달랐기 때문에 여행지도 그만큼 많았다. 에릭 와이너는 혼자 탐구한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철학자마다 주요한 추종자들을 직접 만나 대화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을 진 빠지게 물고 늘어지며 이겨버리곤 했지만 그건 대체로 대상들이 소크라테스보다 생각이 부족해서 일뿐이다. 소크라테스도 각양각색의 대상들과 많은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필시 배운 점들이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철학은 진정한 대화라고 일축해도 무방하며 그 대화는 말 그대로 대화이지 일방적인 설득은 아니다. 에릭 와이너의 기차여행 중 딸 소냐와의 대화도 여행이 무르익어 갈수록 패턴이 달라진다. 치기 어린 줄만 알았던 딸에게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여행 막바지에는 적극적으로 여행 미션에 임하는 딸 소냐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는 딸 소냐 역시 아버지와 함께 경험한 것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층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기차여행은 딸 소냐에 대한 아버지 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식 '현명한 훈수질'이라고 볼 수 있다.




p197.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이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p209.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쾌락으로 향하는 길을 추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게으르거나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추론을 잘못한 것일 뿐이다. 쾌락과 고통을 평가할 때 신중함을 발휘해 "냉철한 추론"을 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p213.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쾌락주의 학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방종이 아니라 계산적인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쾌락을 추구할 때 그 결과의 고통이 무엇인지 따져보고 현명한 쾌락을 추구할 때 불안에서 벗어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은 담배를 빠는 것이 급할지 몰라도 담뱃갑에 버젓이 그려져 있는 꼴이 될까 봐 불안한 마음이 더 크다면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행복은 개인의 기질이나 성향이 다 내포된 주관적이라서 어떤 이는 다 모르겠고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담배를 유지할 수 있다. 매일 그저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며 남는 시간에 누워서 드라마를 보는 것이야 말로 행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주의할 것은 그 모든 추구가 한없이 길게 반복되고 연장된다고 해도 불안이나 고통 없는 현명한 쾌락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계산은 자꾸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이라 계산적인 쾌락 추구의 산출값이 보다 더 행복에 가까워지면 어느새 불필요한 쾌락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작은 쾌락에도 만족할 수 있으며 늘 행복한 경지에 이른다.

 



p318. 친절할 수 있는 능력은 언어 능력과 같다. 우리 모두는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 하지만 그 능력은 부모님이나 로제타스톤을 통해 활성화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져야 한다. 공자는 그 방법이 바로 공부라고 본다. <<논어>>는 공부를 칭송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p324. 친절은 힘든 것이다. 우리는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다른 승객들도 뉴욕만의 미묘한 방식으로 불편해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여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선다. 어떤 사람은 더욱더 빤히 앞을 쳐다본다. 나는 공자의 책에 얼굴을 파묻는다.


 

 대도시는 불친절해 보인다. 하지만 속속들이 보면 다들 바쁘고 정신없기 때문에 서로 감정상 하지 않기 위해 오히려 친절한 모습들이 많다. 뉴욕시 지하철에서 누추한 차림에 인간의 발 같지 않게 망가진 맨 발로 걸어 다니던 여자가 쓰러지자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애쓴다. 그러다 그녀가 비틀비틀 일어서서 말한다.

"나도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어요."

 계속 반복되는 그 안타까운 발언에 사람들은 이제 도움의 손길을 거둔다.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여 외면하게 된다. 빈틈없어 보이는 지하철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탈 수 있게 어떻게든 틈을 더 만들어보는 단순한 친절은 쉽지만 이런 경우의 친절은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에 어렵다. 어쨌든 외면한다 할지라도, 대도시라도 친절하고 싶은 마음은 대부분 갖고 있다. 우리가 언어를 습득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건 친절도 언어와 마찬가지로 노력과 학습으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친절할 필요가 있냐고 학습되어 버리면 하자인 인간이 돼버리고 어떤 영문으로 숲 속에서 동물들과 자란 인간은 동물적인 언어만 가능하다. 쓰레기가 없는 길가에 버젓이 쓰레기를 버리며 튀고 싶은 사람은 없고 다들 춤을 추고 있다면 기꺼이 춤을 출 수 있다. 다들 친절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미 타고난 친절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친절해질 수 있다. 언어능력이 한 번 발현되면 그 잠재력이 엄청난 것처럼 친절 또한 하나의 친절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서로 더 친절하려고 난리가 난다. 공자는 그렇게 모두가 친절한 문화가 만들어지도록 수양해야 한다고 했다.




p336.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즈이히츠를 실천하는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 지적 가려움을 긁은 다음,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글에 구조를 보여한다기보다는 구조가 스스로 나타나게 한다.

p337.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쇼나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안다. 쇼나곤은 몇 세기 후 니체가 발전시킨 철학 이론인 관점주의를 따른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쇼나곤은 말한다.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세이 쇼나곤은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철학자 중에 가장 모호한 인물이다. 다른 철학자들은 이름만으로도 인정이 되는데 이 사람은 이름도 생소하며 무슨 책을 썼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책 속에 주욱 이야기해 주는데도 선뜻 철학자라고 인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우리는 신이 아닌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존경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통의 인간들이 삶에 급급해서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 어쩌면 죽기 전까지 얻지 못하는 지혜를 인간임에도 꿰뚫었고 그런 통찰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잃고 수난을 겪고 희생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짊어졌던 인간인 철학자들을 높게 쳐주는 것이다. 그런 존경 쌉가능 여부를 두고 보자면 세이 쇼나곤은 익숙한 느낌의 철학자는 아니다.



 일본 황실의 궁녀로 별다른 이벤트 없이 살다 간 그녀의 유일한 특이점은 일기를 매우 정성스럽게 썼다는 것이다. 그녀의 일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간다. 중구난방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녀만의 까탈스러운 기조가 돋보인다. 어떤 경험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줄 안다. 철학을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이 아닌 현실로 끌어내려놓자면 타인이 인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방향에서 자기만의 방식이 확고하게 정립된 자를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연재 중인 에세이도 처음에 기획서를 낼 때는 형식에 맞추긴 해야 해서 몇 부작 동안 어떤 결론으로 갈지 썼지만 전혀 그 형식으로 가고 있지 않다. 세이 쇼나곤처럼 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고 이런 식이라면 무한대 창출도 가능할 것 같다. 만의 기조나 철학? 그것도 분명하다. 철학자 꿈은 아니지만 철학자의 기질이 있다는 건 작가가 되기에 좋은 기질이다. 최근 내가 이렇게 글을 써도 되는지 회의가 들기도 했는데 세이 쇼나곤 챕터를 읽으며 내 방식도 충분히 괜찮다고 독려할 수 있었다.




p404. 대부분이 자기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부도 명성도 건강도 통제할 수 없다. 본인의 성공과 자식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뭐, 규칙적으로 운동할 수야 있겠지만 헬스장에 가는 길에 버스에 치일 수도 있다. 몸에 좋은 음식만 먹을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사무실에서 하루에 열네 시간씩 일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상사가 당신을 싫어해서 당신의 커리어를 방해할 수도 있다.

p409.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우리는 자기감정이 정확하다거나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p410. 틀린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보자. 먼저 외부사건에 대한 반사반응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발가락을 찧으면 소리를 지른다. 도로가 막히면 욕을 한다. 자연스럽다. 어쨌거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이 최초의 충격은 감정이 아니라 당황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같은 반사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고, 스토아학파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며칠 전 아이와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난으로 서로 총싸움 하듯 걷다가 갑자기 이런 대화가 펼쳐졌다.

 "나는 누가 엄마를 공격하면 보호해 줄 거야!"

 "공격? 누가 미쳤다고 나를 공격하겠어. 그쪽이 무조건 지지 않을까?"

 "하긴. 엄마를 누가 이겨. 엄마는 참 씩씩해서 좋아!"

 오래간만에 다시 나의 T성향에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느라 감정이 풍부해봤자 너무 비참하고 너무 슬프고 너무 화날 것들만 잔뜩이라서 일부러 감정이 자라지 않게 누르고 살아왔다. 결과적으로 어떤 일도 별 개의치 않고 세상 두려울 게 별로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만족한다. 그런데 요즘 '너 T야?' 하며 T가 무슨 하자인 것처럼 떠든다. 하지만 T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고 문제해결중심 성향일 뿐 그저 싹수없고 예의 없고 남을 무시하는 성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T냐 F냐를 따질 때 그것과 무관한 인성을 집어넣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측컨대, 예전과 달리 요즘은 열심히 살아도 확실하게 보장되는 게 없고 해결책이라는 것도 너무 무궁무진이라 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세상이라 다들 힘들어서 그런지 잘 토닥여주는 F에 대한 선호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쓰는데 달에 1,200만 원 벌었다는 사람들의 통장 내역증빙, 라면은 건강에 좋으니까 달에 이상 먹으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평생 삼시세끼 라면만 먹고 할아버지의 세상 멀쩡하고 건강한 검진결과서, 전략적으로 스케줄에 따라 열심히 공부시켰는데 형편없이 모자란 아이의 성적표, 프로젝트마다 성공적이었음에도 승진에 실패한 자들이 예이다. 예전처럼 대학만 나오면 남은 인생이 보장되던 세상도 아니다. 때로는 쉽게 사는 사람들이 쉽게 성취한다. 개인의 운이나 팔자나 운명 또는 어느 조직에 흐르는 알 수 없는 흐름, 우연적 사고 등 통제불가능한 영역도 있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고 여전히 성실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어쩌라고!하면서 욕하고 싶은가?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어떤 현실을 보더라도 정신을 붙잡고 꼿꼿하게 나아가기 위해서.



 얼마 전 sns에 누군가가 자기는 T인데 예전에는 친구들의 고민이나 하소연에 자기 스타일대로 상담을 해줬고 별 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최대한 T처럼 안 보이게, F들이 상처받지 않게, 오해하지 않게 여러 생각을 거친 후 말을 하게 된다며 글을 올렸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며 동질감을 느꼈다. T인 게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노력의 결과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결코 나쁠 것이 없다면 해볼 만한 노력이다. 역으로 F의 경우 자신의 감정의 풍부함이 이익보다 실이 큰 경우를 인지하고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트는 훈련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건 본인이 그 훈련을 원할 때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안 해도 그만이다. 요지는 스토아학파가 말한 대로 이성과 감정은 모두 통제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그저 감정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감정적이게 굴고 싶은 마음에 내부 프로세스에서 '동의'를 입력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선택했듯이 미션 수행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해내기 위해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동의' 함으로써 감정을 누를 수도 있다.

 



p458. 사람들은 노인을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바라보고, 노인들도 곧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노인들은 노인을 연기한다. 일찍 도착하는 손님을 위한 할인 메뉴를 주문하고 카리브해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며 우측 깜빡이를 켜놓은 채로 5킬로미터를 달린다. 왜냐하면 그게 노인들이 해야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잠깐 기다려보라고 말한다. 일찍 온 손님을 위한 특별 메뉴를 정말 좋아하는 게 맞습니까? 그건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내린 선택입니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행동하게 된 건가요?




 사람은 원래 연기력을 타고났고 연기하기를 좋아한다. 어린아이가 실제로는 이미 알 거 다 알고 컸는데도 어린아이처럼 굴며 상황을 모면하고 그렇게 착한 자식이 아닌데도 효자효녀인 척하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한다. 젊은 시절에는 특히나 그다지 미남미녀가 아닌데도 꽤 자신이 봐줄 만한 수준인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걸어 다닌다. 회사에서는 일을 덜 하고 싶어서 일을 잘 못 해내는 사람으로 보이되 잘리지는 않게끔 섬세한 곡예를 하고 어떤 이는 야망이 너무 큰 나머지 회사는 곧 내 삶이라고 착각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솔직할 수 없고 자신의 좋은 점은 과장하고 나쁜 점은 은폐하거나 축소시킨다는 점은 지난 연재글에도 썼다. 결국 사랑의 시작도 연기는 필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나 젊은이들이 하는 연기는 그 연기를 하고 싶은 욕구에 의한 것이므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탁월하기 때문에 주인공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노인들의 연기는 자신들이 그 연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누가 봐도 짠하다. 그래서 노인들의 삶은 자기 삶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주인공 같지 않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의 주인공인 보부아르는 자신의 저서 <노년>에서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인들이 자신의 삶인데도 주인공일 수 없는 것은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노인들이 주인공처럼 억지를 부리고 욕망하고 기대하고 과장하고 은폐하거나 교묘하게 굴면 못 볼 꼴 본 듯한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데 자기들은 노인이 되지 않을 것처럼 군다.



 나도 20대 때는 누가 40살이라고 하면 그저 아줌마 취급을 했지만 내가 40살이 되고 보니 도대체 아줌마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안 했으면 몇 살이든 아줌마가 아닌 건지,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으면 아줌마가 아닌 건지, 소위 아줌마라고 하면 느껴지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대로 안 살고 있으면 아줌마가 아닌 건지 다 모호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난 내가 아줌마 같다고 느낀 적이 없으며 앞으로 나이를 훨씬 더 먹는다고 해도 그럴 것 같다. 자신감 오진다고 치부해도 딱히 부정하지 않겠지만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모든 연령대에서 나오는 호칭들이 가지는 기준들은 모호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사전적으로 노인은 65세 이상의 인간을 의미하고 그때부터 죽기 전까지의 기간을 노년기라고 한다지만 이것조차도 몇 년 전에는 60세가 기준이었고 과거에는 더 젊은 나이부터 그렇게 규정했으며 국가마다 다르기도 하다. 아줌마, 아저씨, 노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함으로써 얻는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면 먼저 손들고서라도 규정하겠지만 그런 규정을 해버리는 바람에 파생되는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많기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아무리 늙었어도 꽤나 어보이고 옷을 잘 입고 잘 관리된 노인들이나 부자거나 권력이나 명예를 가진 노인들은 주인공으로 인정해 준다. 물론 그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다른 형태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것에 더 존경을 표하거나 롤모델로 삼을 수는 있다. 문제는 우리가 노인답게 이래도 저래도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종용하는 대상이 가난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노인들이라는 것이다. 훗날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은 현명하지만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노인을 당연하다는 듯이 싹 쓸어 저 구석에 처박아두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어린 아이나 젊은이들이 주인공답게 해내지 못하고 스스로 구석에 처박히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하고 어떻게든 주인공을 해내라고 독촉하면서 왜 그저 그런 노인들이 그래도 주인공답게 살겠다고 하는 모습은 꼴 사나워하는 것인가? 열심히 살았다고 누구나 다 보장된 삶을 살지는 않는다. 무슨 자신감으로 자신들이 어떤 노인이 될 줄 알고 마치 다들 젊은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챕터보다 노년을 다룬 보부아르 챕터에서 가장 많은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내가 확실히 늙어가는 중이라는 방증이라 조금 슬프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특히나 들뜬 단풍놀이가 다 지나가고 쓸쓸함이 밀려오는 늦가을은 철학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철학 편집숍 같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어보고 개인마다 특히 끌리는 철학자가 있다면 따로 더 깊게 알아보고 다른 연관 도서를 읽어보는 탐구적인 늦가을을 보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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