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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쾌한T맘 Oct 19. 2024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작가와 제목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 있다. 오늘 이야기할 책이 바로 그렇다. ‘나는 사실 에밀 아자르가 아니며 그런 사람은 없고 나는 바로 너네가 예전에도 공쿠르 상을 줬던 로맹 가리다.’라는 폭탄선언 후 자살해 버린 것부터가 작품인 사람이니까. 모두를 속인 채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탔던 그가 이름이 두 개는 세 개든 상관없이 나는 이 사람의 작품을 참 좋아한다. <그로 칼랭>,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등 평생에 걸쳐 다작했으며 모스크바계 유태인으로서 프랑스에 살며 법학을 전공하고 외교관과 2차 세계대전 중 대위를 맡았으며 훗날은 <하늘의 뿌리>를 영화화한 <천국의 뿌리>에 영화감독도 맡았다. 작가 중에 멍청이가 있을 리는 없지만, 머리가 비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 소개할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은 특별히 어느 부분을 발췌하기 어려울 만큼 모든 문장이 소장각이다. 흉내내기도 어려운 비극 속의 유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쉬울 것이다. 본 영화 또 보고 읽은 책 또 읽는 거 그다지 안 좋아하지만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 교보문고 (kyobobook.co.kr)




 p23. 로자 아줌마는 바나니아에게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 애는 천하태평이었다. 그 애는 겨우 세 살이었고, 가진 거라곤 미소밖에 없었으니까. 로자 아줌마는 바나니아는 빈민구제소에 보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그 아이의 미소만은 떠나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와 아이의 미소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별수 없이 둘 다 데리고 있을 수밖에.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국적의 유태인으로서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로자 아줌마는 프랑스 법상, 자신의 아이들을 키울 수 없는 창녀들의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아이들 하나하나, 위조된 서류로 신분을 감추며 숨어 지내고 있다. 아이들은 위조된 서류 덕분에 학교를 다니기도 하고 입양되거나 부모 중 누군가가 데려가는 등 계속 바뀌지만 어쩐지 모모만큼은 서류가 있음에도 학교도 못 들어가고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이 '은밀한 집'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어 살아간다. 로자 아줌마도 이웃들도 다들 뭔가 감추는 눈치다. 이 책 속의 모든 이들은 다 은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더욱 은밀한 존재인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끈끈한 삶이 펼쳐진다. 고달픈 창녀들의 삶인지라 바나니아의 경우처럼 양육비가 계속 밀린 채 몇 달째 애엄마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지만 로자 아줌마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바나니아를 원칙대로 돈을 내지 않는다는, 어른들만의 이유로 내치지 못한다. 열이 뻗쳐 소리는 지를지언정 아이들을 사랑한 그녀와 그녀를 언제나 세상의 전부인 듯 바라보는 모모와 아이들 모두 사랑스러운 대목이다.



 모모는 멀쩡한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며 버리는 미친 인간들은 내버려 두면서 일을 마치면 자기 아이들을 챙겨 보살피고 로자 아줌마에게 양육비도 꼬박꼬박 주는, 그토록 성실한 그녀들을 창녀라는 이유로 자식을 뺏는 프랑스법이 멍청하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법까지는 아니지만 이미 끝난 관계인 마당에 갑자기 나타나 '어머니로서의 자질'을 따지거나 '닥치고 아버지'그런 사상을 들이대며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어미로부터 자식을 빼앗아가는 남자나 그 남자의 집안 그리고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정말 많았다. 그나마도 아들만 데려갔지만. 이러나저러나 사상이라는 건 원래 우스운 이야기일 뿐이다. 프랑스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창녀인 어머니로부터 아이들을 빼앗고 애초에 아버지는 몰랐고 이제 엄마마저 빼앗긴 아이들을 친절하게 보호소에 넣어 책임졌다는 대목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웃지 않을 수 없는 문장들, 울지 않을 수 없는 문장들의 합이 이 책이다.




p65. 나는 어떤 끔찍한 폭력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어 진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부모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학교 입학도 영문 없이 거부당하면서도 꾹 참고 '은밀한 집'에서 다른 아이들과 꾸역꾸역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친절하게 굴며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해버리니 모모는 갑자기 안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위험한 감정에 휩싸인다. 자기의 삶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진다. 여기가 아닌 저기로 가면 다른 삶이 펼쳐질 것만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은 그런 폭력적인 감정 말이다. 하지만 모모는 그 동네의 많은 아이들이 너무 쉽게 빠져버리는 유혹들, 이를 테면 마약이나 범죄나 엉덩이로 먹고사는 것에 빠지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진지하게 바라보는 아이다. 그래서 갑자기 로자 아줌마고 뭐고 뛰쳐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에도 그게 과연 최선인지 아프도록 생각한다.

 



p69. 그녀는 여전히 그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특히 한밤중엔 더욱 그랬다. 아줌마는 기억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모두 끝나서 땅속에 묻혀버린 지금까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유태인들은 끈질기다. 특히 몰살당한 사람들은 더욱 끈질겨서 자꾸 망령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왜들 그랬는지 그 이유라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알 수가 없다.

p96.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살았으니 됐다.라는 말이 때로는 함부로 할 말이 아닌 게 로자 아줌마처럼 살아 있어도 끊임없이 수용소에서의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없었으면 되는 거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고통만 당하다가 죽어버린 사람들에 비하면 조금 나을 수 있다. 나도 한 때 엄청난 일들에 휩쓸려 그냥 콱 죽어버릴 뻔한 적이 있지만 어쨌든 지나가고 살아보니 지금은 예쁜 딸도 있고 뒤늦게나마 꿈도 꾸며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도 그때 수용소에서 죽어버렸다면 모모도 없고 그저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다. 모모는 이야기 속에서 종종 '로자 아줌마와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둘이서 서로를 끝까지 지켜주었기 때문에 숱한 사람들 속에 묻혀있어도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결국 가장 크고 결정적인 것을 가지게 되었다. 로자 아줌마가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마다 모모는 늘 함께 견뎌주고 헤쳐나가는데,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트라우마의 핵심적 요소는 사건, 경험, 영향이다. 사건이 강력해도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트라우마가 남지 않거나 그 영향이 미약할 수 있고 사건이 경미해도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국 트라우마는 주관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나치가 정말 대단한 이유는 나치의 문화정책에 따른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모든 이에게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놈의 사상이라는 건 자기들끼리만 너무 진지해서 웃기다. 흰색 검은색은 그저 색깔일 뿐이고 색이란 건 다양하게 섞여 변하는 것이라서 색은 색으로서 뭔가를 표현할 수야 있겠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같은 사람일 뿐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완벽하게 어떤 인종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개인의 특별함을 어필하는 것은 일종의 표현이지만 인간이 개인이 아닌 집단(인종)으로서의 특별함을 내세우려 드는 순간 그것은 광기가 되고 만다. 그놈의 사상이라는 건 갑자기 자기들끼리 오로지 다른 한쪽을 이기기 위해 아무 생각과 아무 말과 아무 행동을 총동원하며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더 어이없는 건 그렇게 너무나 진지했는데 그놈의 사상이 어떤 이유로 게임에서 지고 나면 사람들은 언제나 평가라는 것을 좋아해서 모모 말마따나 왜들 그랬는지 집요하게 이유를 묻곤 하는데, 진 사상 쪽에 있었던 사람들은 정작 그때 자기들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이유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설령 이유를 말한답시고 입을 열면 열수록 바보 멍청이 병신이 되거나 그저 엉엉 울면서 제가 대신 사죄하겠습니다 하며 생뚱맞게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들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죗값을 치르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천국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옥과 망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 같은 건 생각보다 시원찮은 놈이고 지옥과 망령만이 인간을 정신 차리고 살게 하고 그런 미친 게임에 목을 매었던 사람들을 기어이 처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04. 행복이란 놈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놈에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어차피 녀석은 내 편이 아니니까 난 신경도 안 쓴다.(...)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자고 주사를 맞는 짓 따위는 안 할 거다.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추구해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요즘 행복을 알고 싶어서 팔뚝에 행복을 주입한 자국을 가지는 바람에 나락된 인간들 이야기가 참 많은데 이 책에서도 비슷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 책에서 마약에 손댄 이들은 맨 정신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들긴 해서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래도 모모는 절대로 행복해지기 위해 주사를 맞는 짓은 안하리라 결심하는 기특한 녀석이다. 사실 마약이 한 번만 맞으면 완전하게 행복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늘 행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모모 말대로 행복은 요물이며 고약한 것이라서 요만큼 행복하면 좀 더 크게 행복하고 싶어서 안달이고 그게 충족되지 않으면 게거품을 무는 미치광이다. 결국 행복은 스스로 충족할 줄 알도록 머리와 가슴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주사로 주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는 게 그러해서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행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는 모모에게 하밀 할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주사가 아닌 머리와 가슴으로.



  사실 이 책은 모모가 이야기 초반 하밀 할아버지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 핵심이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이 질문에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의외로 '그렇다'이다. 늘 모모에게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눈과 귀가 되어준 그가 웬일인지 머뭇거림 끝에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지혜로운 하밀 할아버지는 어째서 사랑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모모에게는 행복을 위한 그 사랑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온갖 경험과 지혜를 쌓아오는 삶에서 유일하게, 과거의 찰나의 감정이 아닌 여전히 지속되는 사랑을 주고받을 누군가가 없지만 여전히 살아있으므로 모모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사랑하며 사는 삶에 실패했어도 모모는 실패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은밀한 집' 주변의 이웃들이 아무리 서로를 살피고 보듬고 산다 해도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은 그런 유일한 존재가 있어야만 비로소 행복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찌어찌 하밀 할아버지처럼 적당히 웃고 울어가며 오래도록 살 수는 있는 것이다.




p118. 하밀 할아버지는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노인네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소리에 뭐라 덧붙일 말이 없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 인정은 쉼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쉼표가 아니라, 차라리 인생 전체를 담은 커다란 책 같았고, 나는 그 책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대목은 '유태인의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볼 때면'이라는 부분 때문에 해석이 갈릴 여지가 있다.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으로서 나치군으로부터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와서 자기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데도 불구하고 모모를 비롯한 아이들을 키우며 인정 어린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다른 나의 해석은 - 이야기의 배경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그 배경을 내포한 말이 아닐까 싶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의 역사는 깊고 복잡한데 간략히 말하자면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신사답지 못한 처신으로 지금의 팔레스타인 영토의 주도권이 아랍인에게서 유대인으로 바뀌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독일 나치군의 박해로 밀려들어온 유대인들까지 더해져 유대인들은 자기네 땅을 갖고자 아랍인들을 독일 나치군 못지않게 쓸어버린다. 그 후 아랍인들은 다시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기 위해 수차례 전쟁을 벌이고 온갖 노력을 다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분쟁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인 로자 아줌마는 이미 양육비가 안 들어온 지 오래된 아랍인인 모모를 변함없이, 아니 세월이 갈수록 더 깊게 사랑하며 키웠다. 그것을 모모는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인정 어린 사람으로서 보답해야 맞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때로 그 인정이란 게 하밀 할아버지가 말하는 것처럼 쉼표처럼 가볍게 느껴지지 않고 너무 힘겹고 무거웠고 어려웠다.-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어떻게 해석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고 중요한 건 어린 모모가 점점 병마에 스러져가는 로자 아줌마를 그녀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와 거부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인간들이 자주 겪는 모순을 어린이의 화자를 앞세워 표현했다는 것이다. 사실 어른이라고 해서 당연한 것을 당연히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어른은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를 어린이 화자를 앞세움으로써 그 장점을 극대화한 것 또한 이 책의 묘미이다.




p152.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 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p256.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병세가 심각해지면서부터 자신이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방황하던 중 나딘이라는 성우를 만나게 된다. 나딘은 남편과 두 아이가 있고 멋진 직업까지 있는데,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로자 아줌마와 모모에게는 아무도 없는 것인지 너무나 쓸쓸해서 안 울 수가 없다. 나딘과 점점 친해지며 모모는 그녀가 일하는 곳에서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려가며 배우들의 연기에 목소리를 얹는 작업을 보다가 로자 아줌마의 삶을 거꾸로 돌려 그녀를 젊게 만들고 나서 울어버린다. 나도 얼마 전 혼자 살고 있는 엄마 집에 가서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다가 몰래 운 적이 있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해서 모든 긍정적인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으로 보였고 적어도 아빠 같은 쓰레기를 만나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망치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것처럼 보였다. 모모는 얼마나 더 마음이 아팠을지 감히 공감했다.



 생은 우리들에게 태어나게 해 준 것에 감사하라는 듯이 굴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리곤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생이 더 가혹해서, 그저 파괴하기 위해 생을 준 듯한 경우도 있다. 열다섯 살까지의 로자 아줌마는 태어난 것에 감사했을지 모른다. 갑자기 좋은 곳으로 일하러 갈 거라고 아주 간단한 짐만 꾸려서 서둘러 출발하자고 해서 응한 그날부터 그녀는 가차 없이 돌변한 생에게 파괴당한다. 유태인은 독일군만 잘 피해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프랑스 경찰마저 유태인을 잡아다가 독일군에게 바쳐버린 것이다. 그래도 살아 돌아왔건만 그들이 준 트라우마로 인해 뇌가 잠식당하고 굳어가며 이제는 망할 놈의 자연의 법칙까지 더해져 늙어가면서 생으로부터 야금야금 파 먹힌다.



 자신에게 유일한 존재인 로자 아줌마가 나날이 생에게 파 먹히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어린 모모는 자신도 결국 생에게 파괴될 것임을 상상한다. 내 딸도 고작 초1인데도 내가 아픈 날이면 어떤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도 가끔씩 울면서 나를 안고

 "엄마가 이렇게 아프고 늙어서 나를 떠나버리면 어떡해? 아프지 마."

 할 때가 있다. 지금이야 몸살 좀 났다고 죽지 않아, 엄마는 운동도 열심히 하고 튼튼해, 네가 할머니가 되어도 엄마는 좀 더 나이 많은 할머니일 뿐 살아있을 거야, 등 별별 안심의 말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바짝 메말라있는 예전 같지 않은 손을 매만질 때면 문득, 생이 결국에는 나도 파괴할 것임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생으로부터의 파괴는 예고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생이 태도를 바꾸기 전에, 행복이 있을 때 간과하지 말고 꼭 붙잡아야만 한다.




p153. 사람들은 창녀들이 젊었을 때는 성가시게 쫓아다니지만 일단 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젊은 창녀들에게는 포주가 있지만 늙은 창녀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늙은 창녀들만 맡고 싶다. 나는 늙고 못생기고 더 이상 쓸모없는 창녀들만 맡아서 포주 노릇을 할 것이다. 그들을 보살피고 평등하게 대해줄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에 95kg의 거구의 로자 아줌마를 아이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 들어 올리다시피 올라가는 장면, 남자였다가 여자가 된, 그 무엇도 닮지 않은 사람이라서 더 고단한 창녀의 삶을 살면서도 날로 쇠약해져 가는 로자 아줌마 대신 늘 즐거운 마음으로 아이들의 밥을 차려주는 롤라 아줌마, 점점 피폐해지는 로자 아줌마가 외롭지 않도록 자신들만의 의식으로나마 곁을 지켜주는 왈룸바 씨, 가진 건 힘뿐이라며 그 무거운 로자 아줌마를 오르락내리락해 가며 산책을 시켜주는 자움 씨 형제, 언제나 모모에게 세상을 사는 지혜와 뿌리에 대해 말해주는 하밀 할아버지 등 주변의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이 묻고 따지는 것 없이 서로를 돕고 살아가는 여러 장면들은 이 책이 시종일관 비극임에도 참 따뜻하다.



 창녀의 자식이라고 해서 다 빌어먹을 인간이 된다는 법은 없어서 로자 아줌마가 키운 창녀의 자식 중에는 모모가 가장 선망하는 경찰이 된 사람도 있는데 모모는 그런 사람이 되거나 정 할 것이 없으면 포주라도 되어서 그녀들과 그녀의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비록 부모도 모르고 영문도 모른 채 학교도 못 다니는 모모지만 로자 아줌마가 사랑으로 키워주고 하밀 할아버지가 지혜를 가르쳤기 때문에, 말로는 행복이 뭔지 내 알 바 아니라고 말해도 사랑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행복할 있는 인물로 성장한다.




p212. "부인 저는 병자입니다."

         "누군 병자가 아닌가요? 누군 병자가 아닌 줄 아세요?"




 갑자기 이제 와서 자기 아들을 찾겠다고 모모를 찾아온 모모의 아버지는(사실 이것도 불확실하지만) 자신이 이미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환자임을 자꾸만 강조하면서 자기 아들을 빨리 보고 싶다고 재촉한다. 이미 더하면 더했지 덜 할 것 없이 병자인 로자 아줌마 마가 화가 치밀어 올라 저렇게 말해버리는 부분에서 그녀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로자 아줌마 말고도 지금 모모가 사는 이 동네에 마약, 범죄, 나라나 부모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이들까지.. 병자가 아닌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인데 화가 나, 안 나??



 이 책은 전체가 비극이자 유머이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은 행복한 줄 알고 잘 웃으며 주변을 밝혀줘야 하는데 우습게도, 마땅히 웃고 살아야 할 것들은 꼭 웃는 법을 잘 모르고 그런 것들이 꼭 썩어빠져서 주변을 더럽힌다. 그래놓고 그저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을 짓밟으며 쟤네 때문에 못살겠다고 징징 거린다. 우리는 항상 정말로 비루한 자가 누구인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여전히 웃고 명랑한 보면 아직 가진 별로 없는 같다. 나중에 가진 게 많아져도 썩어빠졌거나 징징거리는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책을 읽는 내내 나와 너무나 결이 같은 비극 속에 유머를 간직한 것이야말로 내가 책을 사랑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p279.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p305. 나는 화장품을 들고 입술에 루주를 발라주고 볼터치를 해주고 그녀가 좋아하던 모양대로 눈썹을 그려주었다. 눈꺼풀은 푸른색과 흰색으로 칠해주고 그녀가 평소 하던 대로 애교점도 붙여주었다.(...)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아주 죽어버리도록 더 아프려고 애썼다.




  아르튀르는 모모가 자기에게 로자 아줌마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게 너무 슬퍼서 우산에 눈코입과 옷을 입혀 만든 친구다. 결국 로자 아줌마가 숨을 거둔 순간도 모모는 혼자였고 그 옆에는 우산인 아르튀르가 있을 뿐이었다. 모모는 한 때 강아지를 구해서 키우기도 했는데 자신의 불쌍한 삶을 강아지도 똑같이 살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강아지를 너무 사랑했으므로 부잣집 아주머니로 보이는 누군가에게 팔아넘겼다. 모모는 강아지를 팔고 받은 돈을 울면서 하수구에 처박았지만 절대 후회의 눈물은 아니었다. 자신의 빌어먹을 인생에는 친구도 강아지도 둘 수 없어서 자기 옆에 있어도 아무 상관도 없을 친구 아르튀르를 만들었다.



 이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비극 속의 유머가 돋보이는 이 이야기도 결국 별 수 없이 가슴이 미어지는 흐름으로 치닫는다. 생은 생으로부터 파괴되지만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그 파괴되는 모습마저, 심지어 생이 아예 끝나버려도 상관없이 사랑일 뿐이다. 모모가 몸무게는 95kg에 병색이 짙어져 가며 죽어간 로자 아줌마를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고 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모모는 그냥 죽어버리고 싶지만 생은 또 생이기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은 생이란 것은 보잘것없으면서 끈질기고 대책이 없지만 우리가 생으로부터 무조건 지켜내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힘든 인생이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을, 그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어쩌면 유머가 사랑만큼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행복한 줄 알아야 하는데 잘 모르는 사람, 행복한 것 같은데 아닌 사람, 내가 지금 웃을 처지냐며 헛된 자기 비관에 빠진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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