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혹시 ‘내로남불’을 아십니까?”
“그건 무엇인가. 요새 나온 용어인가? 가끔 도시에 나가면 내가 모르는 용어들이 많이 나오더군.”
“현대식 부처라고 등산객에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로남불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가?”
“‘내로라하기에 당당할 수 있는 현대판 비구’라고 합니다. 현대에 급격히 재물과 유혹이 많아지면서 소유에 대한 욕망을 인내하기 어려워졌기에 새롭게 생긴 현대식 불인 것입니다.”
“새로운 불의 개념이 탄생했다는 것을 보니 뿌듯하군. 근데 이런 의문이 든다네. 지난 오랜 수행 기간에도 가끔 들었던 의문점인데, 난 불이 된 중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자네는 혹시 내로남불을 본적이 있는가?”
“저 역시 아직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모시는 미륵불, 아미타불처럼 그 역사와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책을 통해 부처님 탄생의 목격자를 보았듯이, 역사가 흐르면 내로남불에 대한 증언이 쏟아질 것입니다.”
“음.. 난 이런 생각을 해보았네. 혹시 불을 목격하지 못한 것은 생의 동안 일어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결함이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거든. 그래서 늘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열심히 생을 바치라는 것. 그것만이 인생의 목표라는 게 과거의 부처님들이 주는 생의 답이 아닐까 생각했네.”
“역시 스님은 다르십니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말씀처럼 저희는 늘 중생입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을 얻은 듯 완성작이 된 것 같다가도 금세 다시 실수하고 불완전해집니다. 그러면 또다시 수행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멈추어 흔들리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 생이겠군요.”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깨달은 바일세. 그렇다면 더욱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흠, 얘기나온 김에.. 사실 지난주부터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네.”
“경청하겠습니다.”
“자네는 아직 도시에서의 탐욕을 버리지 못한 것 같더군. 자네의 침소 근처에서 왕지렁이 젤리를 발견했다네. 젤리는 겉보기엔 그렇지 않아 보일지라도, 엄연히 육류가 포함된 가공식품일세. 심지어 곤충을 형상화한 음식인데, 자네는 어찌 수도승으로서 그 음식을 탐하였는가. 혼자 깨닫는 게 낫겠다 싶어 두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네가 내로남불이 되기에는 평생의 시간도 모자랄 것 같아 조언을 주는걸세.”
“스님. 반성하고 있습니다. 어제 절제의 깨달음을 얻고는 그 왕지렁이 젤리 한 봉지를 처분하였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다른 봉지들은 아직도 남았다는 건가?”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하나씩 처분하며 마음을 다잡도록 하겠습니다, 스님”
“당장 내일 아침까지 모든 젤리를 처분하게. 자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주시게”
“스님, 저희 산 반대편 자락 미실사에 늘 주차되어있는 그 외제 차 말입니다.”
“크음”
“그 외제 차 스님 거인 거 알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처분하신다면 언론에 알리지는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