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은 Aug 25. 2021

엄마의 복직

육아휴직이 죄는 아니잖아요

1년 3개월의 출산휴가+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복직했다. 출산 전 근무하던 부서로 원대 복귀했는데, 약 7주뒤 정기인사에서 인사대상이 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사란 인사권자의 적절한 판단에 따라 이뤄질 수 있는 문제이고, 나 역시 조직원으로서 언제든 인사대상이 될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그런말을 하지 않았지만 '혹시 내가 육아휴직을 다녀와서일까'라는 쓸데없는 자격지심이 나를 괴롭혔다.


인사 즈음, 회사는 취재기자와 편집기자간의 교류를 확대하고 있었다. 취재기자였던 나는 편집부로 발령이 났고,  지금껏 기사거리를 취재해 기사로 작성하는 일을 해왔다면 이제부턴 동료기자들의 기사에 제목을 달고 신문 지면에 기사를 배치하는 업무를 맡아야했다.


생경한 업무도 업무거니와 근무환경은 생후 15개월 아기를 둔 워킹맘 입장에선 최악이었다. 이틀에 한번꼴로 밤 11시반까지 야근을 해야했고 덩달아 자정을 넘겨서야 집에 도착하는 날이 늘었다.  TV 드라마에서나, 맘카페에서나, 뉴스에서나 접했던 워킹맘의 고민이 어느새 '내 것'이 돼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며 회사를 다녀야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나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육아의 부담이 늘어난 남편 역시 '언제든 힘들면 관둬도 된다'는 말을 곧잘 내뱉었다. (남편의 이런말은 위로는 커녕 정말 얄미웠다. 어쩌면 이는 내가 관두지 않은 1등공신일지 모른다.)



부모님은 40여년전 강원도 산골의 시청에서 옆부서 선후배 관계로 인연을 맺었다. 아빠의 적극적인 구애로 사내커플이 됐고, 곧 부부가 됐다. 엄마는 첫째인 나를 낳고 안정된 직업인 공무원을 뒤로한 채 전업주부의 길을 걸었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엔 지금처럼 어린이집이 사회적으로 갖춰져있지 않았고, 아이를 낳으면 경단녀가 되는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 동생 둘을 더 낳았고 한참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이미 아이를 낳음으로서 '직업'을 포기한 길을 먼저 걸었던 엄마는 내게 무슨일이 있어도 회사를 관둬선 안된다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힘들지만 견뎌내야한다 했다. 정 힘들면 엄마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엄마한테 너무나 미안했지만, 엄마의 그 말은 벼랑끝에 몰렸던 내게 너무나 큰 힘이 됐다. 유일하게 오롯이 나만 생각해주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보였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젊은날 자신의 어쩔수 없었던 선택에 대한 미련과 후회를 딸이 그대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을테다. 내딸만큼은 누구의 엄마보단 자기 자신으로서 살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여성가족부가 2020년 전국 25~54세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9년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 10명 중 6명은 육아휴직을 사용한 후 복직하지 못한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6명은 일과 가정, 양립이 힘들어 직장을 그만둬야했단 이야기다. 주변을 둘러봐도 비슷한 처지는 많았다. 지구반대편도 워킹맘의 삶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오죽하면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캐나다 드라마 '워킹맘 다이어리'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워킹맘 선배들은 밥을 사주며 "어쩔수 없어. 다들 그렇게 살았어. 근데 그거 한때야. 지금이 젤 힘들 시기고. 버텨"라고 조언해줬다. 어떤 선배는 "애엄마라고 야근을 못한다고 하거나 일을 빼달라고 하는건 너에게 너무나 마이너스인 행위야"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회사가 1년 넘게 배려해줘서 육아휴직을 했으면 고된업무 정도 한동안 맡아서 하는거 당연한게 아닌가"라고도 했다.  이런저런 조언을 떠나 학생시절부터 그토록 되고팠던 '기자'라는 직업을 내처버릴만큼 나는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였다.


일단 쓸데없는 피해의식을 버리기로 했다. 내가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온 애낳고 온 여직원이라서 전혀 다른결의 부서로 이동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정말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의 인사 전후로도 인사교류는 계속 이어졌고, 훌륭한 취재 선후배들이 같은 부서로 이동했다.


생각을 달리했다. 회사가 내게 또 다른 세계를 배울수 있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편집업무를 담당하며 정치,경제,사회,문화, 국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시각을 넓힐수 있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특히 과거 문화부 기자시절 인연을 맺은 한 취재원이 알려주신 구상 시인의 '꽃자리' 시가 큰 힘이 됐다. '내가 앉는자리가 곧 꽃자리'란 마인드, 그렇게 마음 먹으니 한결 편했다.


15개월이었던 아이는 어느새 37개월이 됐고, 어린이집 0세반 원아에서 곧 유치원 입학을 앞둔 형아가 됐다. 지금도 편집부에서 이틀에 한번꼴의 야근을 이어가고 있지만, 정말 그때 관두지 않고 계속 일을 하고있음이 스스로 대견하고 감사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정말 한결 수월해졌다. 아이도, 남편도, 나도 모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앞둔 워킹맘들, 그리고 복직 후 고군분투하고 있을 수많은 엄마들에게 "너무나 힘들겠지만, 몇년만 버티자"라는 뻔하디 뻔한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엄마들이 있다면 존경하는 선배가 내게 해준 말을 토스해주고 싶다. "모든 일은 좋은 결과와 나쁜결과가 아닌 좋은 대응과 나쁜 대응만 있다"라는 조언을.  고군분투하는 삶일지라도 엄마의 경력이 하루 더 늘어날수록 점점 단단하고 능숙해질것이다. 우리 엄마, 부모님이 앞서 보여준 인생처럼.







이전 08화 아이의 돌발진, 그리고 응급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