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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Sep 07. 2022

이저학생은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지

뉴스레터 <막차> 2호 백업

모르는새 봄꽃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싹이 조그맣게 피는 듯 하더니 4월 다 갔다. 시간 지날수록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산다더니, 제대로 된 봄나들이 한번 나가본 적 없는데 새로운 달을 맞이해야 하는 심정이 억울하기만 하다. 게다가 오늘 아침 등굣길에는 완연하고 짙은 초록비 냄새가 나는게 아닌가. (케이팝 홍보문구는 아니지만 생각나서 링크를 넣어 두었다.)


살아온 날의 절반 이상, 근 십수년의 인생을 학사일정에 맞추어 보낸 나로서는 4월 = 중간고사라는 인식이 아주 뿌리깊게 박혀있다. 독자 여러분도 학교를 다니며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어설프게 벚꽃구경을 하던 날들이 못해도 한두번은 있었을 것이다.


이저�️는 중간고사에 그렇게 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 다 놀 때 놀고, 남들 마실 때 그냥 마셨다. 불성실하긴 했어도 학문의 장인 대학의 일원으로서 공부를 아예 안하진 않았는데 했다고 말하기도 뭐한... 안일한 마음으로 중간고사를 봤다. 오히려 시험기간이 되면 교수님들이 시험 전주 휴강을 때리셔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의 입장이 됐다. >충격! 시험조교 진짜 계심.< 올해 이저는 처음으로 조교를 하게 됐다. 시험 관련 업무만 하면 된다는 교수님의 말만 철썩같이 믿고 꿀조교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메일이 하나 날아왔다. <중간고사 시감 관련>.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교수님이 맡은 학부 수업이 다섯개나 있었다. 학생 수가 무려 도합 150명. 띠용. 제가 이걸 다 채점해요? 네. 그렇다네요?


중간고가 기간이 되자 정작 내가 술마실 시간이 하나도 없다. 아아, 시험 끝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술약속을 잡던 때가 행복했지. 시험 당일 아침 인쇄할 문제를 보내시는 교수님을 보며 교수님들이 7주차에 휴강권을 날리신 것은 본인이 죽지 않기 위한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만 같다. 묵직한 시험의 무게를 이기고 아주 홀가분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마시는 술이 얼마나 맛있는건데! 당분간은 그런 기쁨을 이젠 누릴 수 없겠구나. 단지 다른 입장에 선 것 하나로 중간고사의 추억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이런거라면 저 시험조교 파업하겠습니다. (그런데 받아먹은 대학의 녹이 있어서 안 됨.)


이제 내 앞에는 나를 영혼 없는 눈으로 감시하는 시험감독(이건 나다.) 대신 열심을 다해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앉아 있다. 어색하게 무게 잡다가 여러분 핸드폰은 꺼주시고여? 빨리 푸시면 퇴실 가능하시고여? 같은 물음표 살인마 어조를 남발하기도 하고, 맨 뒤를 알짱거리며 에휴 모르면 빨리 퇴실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지. 얘들아 한시간 넘어가면 생각 안난다니까. 따위의 거만한 생각을 하고. 주말동안은 내내 채점을 하며 음, 우리 민규 학생은 공부를 하나도 안했구만. 우습게 말을 꺼내다 내 미련 넘치는 학부 성적을 생각하며 아차하기도 하고. 올해의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아직 채점할 것이 산더미처럼 남아있는 시험지를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시험을 치르고 교수님들을 씹어 대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그 시기의 학생들만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교는 채점을 할테니 너희는 술을 마셔라. 사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는게 중간고사잖아요. 내 인생의 문제도 누가 채점해 주면 좋으련만 답은 없고, 미룰대로 미룰 것도 없지만(농담).


나는 이제 중간고사를 치를 일이 없는 친구들에게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자고 해야겠다. 미래의 나에게 어떻게든 되겠지!를 외치며 기말에 희망을 걸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런게 청춘이니까, 핑계를 대며 성큼 다가온 초여름밤 맥주잔을 부딪히는 일. 밤샘과 피곤에 짓눌린 몸이어도 잠시나마 걱정을 날리고 깔깔 웃는 일. 나도 그걸 오랜만에 떠올려보려고.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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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와 이저가 매주 보내는 가벼운 음주사담 뉴스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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