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그들처럼...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이곳 Hôtel de Ville(파리 시청)이었다. 아니, 단순히 파리의 한 관광 포인트가 아니라 어쩌면 이곳은 이번 허니문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지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파리를 넣은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우리 집 커피메이커 위에 붙어있는 빛바랜 이 엽서에 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던 내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학길에 올랐던 30년 전. 당시 과외해서 번 돈 200만 원이 전재산이었던 만큼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파리는 아름다웠고 그리고 쓸쓸했다. 담배를 물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파리의 가을은 내 가슴속을 내 뱃속만큼 허전하게 만들었다. 나도 저들처럼 멋스럽게 담배를 물고, 옆구리에 바게트를 끼고 걸어가고 싶었지만, 담배를 사서 필 여유도 없었고, 혼자 살면서 아프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나를 붙들었다.
그 서늘함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사랑을 보았다. 당시 한국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공공장소에서의 키스가 파리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개인의 일상이었다. 나에겐 큰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또한 큰 상실감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디서나 사랑을 나누었다. 공원 벤치에서 키스하고, 도서관의 에스컬레이터에서도 키스하고, 앉으면 무릎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전철 열차 안에서도 그들은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누었다. 나는 마치 영화 속을 거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엽서를 만났다. 똑바로 서서 마주 보는 키스가 아니라, 사랑이 충만해서 길 가다 말고 문득 나누는 키스, 그러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을 쳐다보지 않는다. 사랑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고, 이 갑작스러운 키스는 마치 사랑의 고백처럼 보였다. 사실 이 안에 숨은 그들의 진짜 사연은 내가 알 리가 없었지만 나는 나도 이런 키스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 엽서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구입한 이 엽서는 내 서랍 속에 고이 간직되었고, 결국 유학과정을 끝까지 마치지 못한 나를 따라 귀국했다.
그 이후로 이사를 다녀도 이 엽서는 다른 프랑스 엽서들과 함께 계속 나를 따라다녔고, 어쩌면 한 두 번 열어 봤었을까? 대부분은 그냥 봉지에 담긴 채 장소만 옮겨 다니며 세월을 같이 했다. 그러다가 첫 결혼을 마무리하고 나는 대대적 짐 정리를 해야 했다. 막판에는 그저 서두르듯 짐을 뭉뚱그려 이사를 했지만, 그 과정에 프랑스 엽서들은 또 그렇게 나를 따라왔다.
이 엽서를 다시 발견한 당시 나는 현재의 남편과 막 사귀기 시작한 참이었고 그는 멀리 캐나다에 있었다. 나는 뒷면에 나의 사연을 적었다. 이 키스는 내가 잊고 있던 나의 버킷 리스트라고... 당시에 내가 꿈꾸던 연애는,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그가 퇴근하면 현관으로 달려 나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 듯 반기고 싶었다고... 소박하지만 현실이 되기엔 너무나 로맨틱한 어린 시절의 이야기,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리고 그렇게 함께 해줄 수 없었던 이야기를 적어서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 엽서를 받은 그는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이 엽서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당시의 내 외로움이 너무나 짠해서,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청춘이 너무 안타까워서... 엽서 앞면과 뒷면을 번갈아 보면서, 사진 속 그녀에 나를 이입시키고 그렇게 멍하니 한참을 있었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결혼을 했고, 우리는 내 꿈속처럼 그렇게 매일 표현하며 산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그가 퇴근하면 나는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그를 맞이하고, 서로 반가워하며...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숙제가 있었다. 나와 함께 파리에 가서 저 키스를 꼭 하고 싶다는 것. 나의 버킷리스트를 채워주고 싶다고.
이렇게 우리는 여기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청 건물의 웅장함에 가슴이 뛰었다. 여기 정말 얼마 만에 와 보는 것인지... 여기서 키스를? 흠...
우리는 아침식사 후 나와서 줄곧 걸었고, 이미 시각이 오후 한 시 반을 넘어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점심을 먹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오자 했다. 그리고 미리 검색해두었던 글루텐프리 식당을 찾았다. 그곳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식당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식후에 다시 찾은 파리 시청. 옛날의 그 장소가 가진 낭만을 생각한다면 다소 빛바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뜬금없이 바닥에 모래를 깔아놓고 사람들이 거기서 비치볼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여름휴가철이라지만, 그리고 이곳이 시청 앞이어서 시민들의 즐거움을 챙겨주는 곳이라지만, 유적지 같은 이 건물을 보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좀 더 가까이 가서 파리 시청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이 각도가 맞을까? 여기서 키스를 하면 될까? 하지만 저 엽서에 나온 장면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는 그 흔적을 남길 수 없을 텐데... 그렇다고 행인을 붙들고 찍어달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냥 기념사진도 아니고 키스신을...
이럴 때 딸내미가 옆에 있었다면, 그렇게 서지 말고 방향을 틀어라, 고개를 더 들어라 등등 각종 잔소리를 해 가면서 진지하게 작품(?) 사진을 찍었으리라.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 흔한 셀카봉 하나 제대로 못 챙긴 나를 원망하랴? 하긴 셀카봉 같은 것으로 엽서 사진을 연출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찌 되었든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던 그 키스신을 연출하였다. 어차피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잠시간 그 엽서 속의 연인이 되었다.
나이도 잊었다. 여행 중이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리고 그냥 잠시 파리의 일부분이 되었다. 시청 앞 광장과, 낯선 이들의 발걸음과, 찌푸린 날씨와 모두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나의 오래된, 그리고 잊혔던 버킷리스트가 채워졌다.
그리고, 그곳을 떠났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