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장 손때 묻은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단연『백범일지』였다. 표지의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책을 펼치면 펜으로 그어진 밑줄이 가득했다. 산 모든 책을 읽지는 않으셨지만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셨는데, 그중에서도 이 책은 곁에 두시고 자주 읽으셨다.
아버지가 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건 2018년 겨울이었다. 강의가 있어 집에 들렀던 막내오빠가 아버지의 얼굴빛이 검은 것에 놀라서 병원으로 모시고 갔고, 여러 검사를 거쳐 담도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술은 거부하셨고,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광주의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셨다.
2019년 3월,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기력이 약해지셔서 말씀을 많이 하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나는 부모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 부모님의 인생을 적을 수 있게 만들어진 책을 가지고 갔다. 어린 시절의 꿈을 여쭈었을 때, 아버지는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하셨고, 엄마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가장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백범일지』야”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서야 어릴 적부터 늘 곁에 있던 그 책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백범 김구의 강직함과 고집스러움 속에서 어떤 이상형을 보셨던 것 같다. 타인의 시선보다 스스로의 신념에 충실하려는 태도, 묵묵히 제 길을 걸어가는 자세를 닮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 생활에서는 화도 잘 내시고, 고집도 세시고, 세상과의 거리를 스스로 만들며 사셨지만 그 고집의 이면에는 ‘옳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가고 싶은 사람’의 이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런 책은 한강 작가의『소년이 온다』였다. 광주가 고향인 나는 1980년의 5월을 기억하고 있다. 금남로의 끝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대문에 남은 총검 자국과 버스에 탄 시위대에게 음식을 건네주시던 어른들의 손길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소년이 온다』를 처음 읽었을 때 그 시절의 기억이 문장 하나하나에 겹쳐 다시 떠올랐다. 소설 속 동호가 도청에서 시신을 지키던 장면은 내가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들과 겹쳐졌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문학이 단지 아름다운 문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기억하고 인간의 존엄을 묻는 행위임을 다시 깨달았다. 읽는다는 건 결국 잊지 않는다는 뜻이고,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소년이 온다』는 나에게 다시 문학을 읽게 한 책이자, ‘책을 읽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남긴 책이었다.
아버지의 최애책이 개인의 신념과 소신을 지키는 이야기였다면, 나의 최애책은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의 고통을 바라보며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아버지는『백범일지』를 통해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되새기셨고, 나는『소년이 온다』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면서도 강한 존재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세대가 다르고 바라보는 세계가 달라도 두 책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끌어낸다.
책장에 꽂힌 책은 달라졌지만, 책을 읽는 마음은 이어지고 있다. 한 세대의 독서가 다음 세대의 독서로 이어지고, 책은 세월을 넘어 마음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된다.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여전히, 읽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