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독을 하게 된 이유
아버지의 서재에는 묘한 책들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일본책을 번역한 허술해보이는 책들이었다. 『혈액형 성격학』, 『초능력자가 되는 법』, 『30일 만에 속독 완성』 같은 제목들이 그랬다. 국어사전 옆에 나란히 꽂혀 있는 이 책들은 표지만 봐도 왠지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끌렸다.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걸까. 초등학생이던 나는 ‘정말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책을 꺼내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가진 건 초능력에 대한 책과 속독법에 대한 책이었다. 당신도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는 책에는 염력, 투시력, 텔레파시 등을 포함한 여섯 가지 초능력이 소개되어 있었고, 나는 그 중 제일 만만해 보이는 투시력 훈련을 선택했다. 상자 속을 투시해서 안에 들어있는 것을 알아내는 훈련이었는데,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며칠 간 연습을 해봐도 아무 진전이 없었다. 며칠 만에 포기했다. 대신 그 옆에 있던 속독 책을 빼들었다. 이번엔 왠지 진짜 될 것 같았다.
속독 책은 점과 선으로 빽빽했다. 하루치 훈련량이 정해져 있었고, 여러 개의 점을 눈동자를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며 보는 훈련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책을 펼쳐놓고 점을 따라가며 눈동자를 굴렸다. 며칠이 지나자 한 페이지를 Z자 모양으로 훑으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된다! 그 때부터 책 읽는 속도가 빨라졌고, 나는 스스로 ‘속독이 되는 아이’라 믿게 되었다.
속독의 진가는 달콤했다. 초등학교 때는 무협지와 추리소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할리퀸 로맨스와 실루엣 로맨스를 탐독했는데, 하루에 여러 권을 빌려 읽으려면 속독은 필수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활자가 눈앞에서 흘러가듯 지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아버지의 서재가 남긴 가장 기묘한 유산이었다. 과학적 근거는 하나도 없는 책들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읽기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물론 속독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빨리 읽어야 할 책이 있는가 하면,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읽는 목적에 따라 속도를 조절한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문장을 되뇌며 읽는다. 책을 꾸준히 읽는 사람이라면 속독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깊이 읽어야 할 책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흘려 읽어도 되는 책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이들을 보면서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둥이 중 큰아이가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그랬다. 두꺼운 SF 소설을 들고 앉더니 하루 만에 끝내곤 했다. 류츠신의 『삼체』를 나보다 먼저 읽었고, 1,000페이지가 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도 며칠에 걸쳐서 읽었다. 처음엔 설마 싶어 중간 내용을 슬쩍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답을 듣고 나면 정말 다 읽은 게 맞았다. 아이를 의심했던 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속독 훈련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여전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