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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서재에서 만난 인생책 두 권

『삼국지』와 『인간의 조건』

by 책읽는 리나

책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랐지만, 정작 내가 읽고 싶던 책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어린이용이나 청소년용 책은 거의 사지 않으셨다. (물론 기억이 조금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 서재의 책들은 모두 아버지를 위한 책들이었다. 삼중당이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어린이 문고책 몇 권이 있었지만, 그것도 1권부터 차례대로 산 게 아니라 아버지 기준에서 ‘읽을 만하다’ 싶은 권만 골라 사셨다. 그런 책들을 읽으며 재미를 느낄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양서’들이 빽빽히 꽂혀 있었지만, 내가 끌리는 책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레 다른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초등학교 때는 추리소설과 무협소설, 중·고등학교 때는 로맨스 소설을 탐독했다. 그중에서도 셜록 홈즈 시리즈에 푹 빠졌다. 당시 유행하던 손바닥만 한 문고판 ‘다이제스트 홈즈’ 시리즈를 읽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추리소설 애호가였던 둘째 오빠는 돈이 생길 때마다 홈즈 시리지를 한 권씩 사 읽었고, 나는 오빠가 없는 틈을 타 그 책을 몰래 읽었다. 홈즈가 관찰력으로 단서를 찾아내고, 차분히 퍼즐을 맞춰가며 범인을 지목하는 장면은 언제나 짜릿했다.


오빠는 추리소설뿐 아니라 무협지도 사랑했다. 그 시절엔 만화방에서 만화책과 무협지를 함께 빌려보던 때였다. 엄마는 “그런 책은 나쁜 영향을 준다”며 오빠가 무협지를 읽는 걸 못마땅해하면서 읽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빌려볼 오빠가 아니었다. 책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집의 온갖 곳에 숨겨두었다. 나는 매의 눈으로 그걸 지켜보다가, 오빠가 없을 때 슬쩍 꺼내 읽었다. 학교에서도 읽고 싶어서, 오빠의 헌 교과서 표지만 남기고 속을 뜯어낸 다음 무협지에 씌워 읽었다. 마치 공부하는 척하면서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몰래 읽기’의 달인이었다.


오빠가 자주 책을 숨겨둔 곳 중 하나는 커다란 냉장고 상자 같은 종이박스였다. 엄마는 그 상자에 폐지를 모아두셨는데, 오빠는 그 사이에 무협지를 숨겨두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엄마가 그 상자를 고물상에 팔아버린 것이다. 안에는 오빠가 빌려온 무협지가 수십 권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오빠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받은 돈은 아마 무협지 몇 권 값도 안 됐을 것이다. 오빠가 그걸 어떻게 변상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회색빛 하드커버 전집들도 빽빽히 꽂혀 있었다.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수십 권씩 연이어 꽂혀있었는데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그 옆에는 일본의 『대망』 시리즈와 『객주』 같은 장편 서사소설도 늘어서 있었다.


그러던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더위를 피해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는데, 서재에서 세 권으로 된 『삼국지』를 발견했다. 세로쓰기 책이었고, 두께는 벽돌만 했다. 처음엔 엄두가 안 났지만, 몇 장을 넘기다 보니 금세 세로쓰기에 익숙해졌다. 그리고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일주일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읽었고, 그 덕분에 여름방학 숙제는 거의 하지 못했다.


등장인물은 많았지만 이름이 모두 두 글자라 외우기 쉬웠다.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조운, 손권, 제갈공명.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한 인물은 제갈공명이었다. 지략이 뛰어나고 냉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에 감탄을 하면서 읽었다. 『삼국지』를 완독한 그 여름 이후, 나는 두꺼운 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소설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는 고미가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을 읽었다. 세 권짜리 책이었는데, 2권까지만 읽고 멈췄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는다는 걸 미리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차마 그 결말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해 울면서 주인공이었던 '가지'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도 있다. 다섯 장이나 되는 긴 편지였다. (지금도 그 편지 내용이 일기장에 남아 있다!) 학력고사를 마친 겨울에야 비로소 3권을 읽었고, 책을 덮으며 또 한 번 울었다.


『인간의 조건』은 중일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광기와 인간의 존엄을 다룬 작품이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일본 장교의 고뇌와 절망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몇 해 전 천정환·정종현의 『대한민국 독서사』를 읽다가, 1960~70년대 한국에서 고미가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이 인기 있던 책으로 언급된 부분을 발견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청춘의 독서 이력이 한 줄의 역사로 복원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아버지의 서재는 나에게 어른의 세계였다. 천장까지 닿는 높이의 책장, 쿰쿰한 책 냄새, 그리고 촘촘한 활자들. 그 세계를 읽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시절의 나는 홈즈에게서 논리를 배웠고, 『삼국지』에서 인간의 관계를, 『인간의 조건』에서 삶의 윤리를 배웠다. 그때는 몰랐지만, 결국 나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인생의 조건을 배우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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