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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리나 Nov 19. 2021

아버지의 만년필


올해 추석에 있었던 일이다. 코로나 상황이기도 하고 올해 부쩍 무릎 통증으로 인해 거동이 편하지 않으신 엄마때문에 둘째 아이만 데리고 친정에 내려갔다. 식구들이 모이면 그 만큼 준비해야할 음식도 늘어나고 일도 많아지기 때문이다.추석 날 오전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상을 차린 후 연도(위령기도: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은 매일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릴 정도로 신앙심이 깊으셨다. 3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담도암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단 하루도 새벽미사 참석을 빼놓지 않으셨다.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셨던 노신부님이 그 말씀을 하시면서 대단하시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까.


연도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는 여느 때처럼 기도문이 복사되어 담겨진 개인별 봉투를 꺼내오셨다. 봉투에는 가족들의 이름과 세례명이 만년필로 적혀있었다. 아버지가 적어두신 것이다. 아버지는 만년필 애호가셨다. 일기나 편지 등 모든 글씨를 만년필로만 쓰셨다. 만년필로 적어둔 아버지의 글씨는 친정집뿐만 아니라 가족들 각자의 집에도 남겨져 있다. 내 지갑에도 아버지가 마지막 해 아이들에게 주셨던 편지봉투를 넣어두었다. 아버지는 매년 새해가 되면 9명의 손자손녀들에게 줄 편지를 각각 쓰셔서 세배 후 나누어주셨다. 하고 싶은 말은 편지에 적어놓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책상 서랍 속에는 그동안 아버지가 매년 써주셨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작년 설 때의 일이다. 친정에 내려갔다가 집으로 올라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나를 방으로 부르셨다. 줄 게 있다면서 헝겊으로 여러 겹 둘둘 말려있는 걸 꺼내신다. 무얼 저렇게 말아두신 걸까 궁금해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헝겊이 다 풀리자 만년필 두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엄마는 '글을 쓰고 있는 네게 이걸 주는 게 제일 낫겠다'는 말씀과 함께 건네주셨다. 만년필 두 자루를 보고 있으려니 그동안 만년필때문에 생겼던 여러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한번은 집에 내려갔더니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만년필이 부러졌다면서 속상해하셨다. 친정 근처에는 몽블랑 만년필을 수선할 만한 곳이 없다며 서울에 가서 A/S를 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가져가서 맡겨보겠다고 대답한 후 올라와서 수소문을 해보니 다행히 집 근처에 몽블랑 매장이 있었다. 만년필을 들고 가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주신 만년필은 평범한 검정색의 외양이 아닌 여러 색깔이 들어간 상당히 독특한 모습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이건 한정판으로 판매했던 거라 국내에서는 AS를 할 수 없고 홍콩으로 보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보내도 반드시 수선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아버지께 전해드렸더니 그럼 그냥 가지고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수선 여부도 불확실한데 홍콩으로 보내는 금액을 부담해야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도로 받아들고 온 뒤에 다음 명절 때 가져다 드리려고 찾아보았더니 어디다 두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분명히 잘 보관한다고 깊이 넣어두었다는 사실만 기억이 날 뿐 그 곳이 어디인지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옷장과 서재의 서랍 등을 모두 뒤졌다. 하지만 끝내 그 해에는 찾지 못했고 다음 해가 되어서야 찾을 수 있어 가져다드렸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아끼시던 만년필 두 자루를 받아서 올라와 서재 서랍 깊숙한 곳에 다시 넣어두었다. 평소에 만년필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사용을 해 본 적이 없다. 김경집의 『명사의 초대』 에 보면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만년필을 쓰는 가장 중요한 용도가 출판 계약서에 서명할 때라고 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아, 이 때 쓴다면 아버지도 정말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읽고 쓰는 (손글씨로 쓰는) 삶을 살아오셨고, 내가 첫 책을 냈을 때도 정말 기뻐하셨다. 만약 다음 번에 원고 계약을 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만년필을 가져가서 서명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상상만 해도 설레고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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