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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리나 Nov 24. 2020

고양이를 보내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다가 떠오른 어릴 적 기억


  무라카미 하루키가 최근 펴낸 <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에세이를 읽었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2008년 고인이 된 자신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에 대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맨 처음은 '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해변으로 고양이를 버리러 갔다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왜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까지 갔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아버지는 고양이가 새끼를 낳으면 키우기 부담스러울 것 같아 해변으로 고양이를 버리러 갔을 거라 짐작한다. 그 당시에는 고양이를 버리는 게 그다지 지탄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던 시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해변까지 가서 버리고 온 고양이는 두 사람이 집에 와보니 자신들보다 먼저 집에 와있었다.



고양이를 버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버지는 소년 하루키에게 끔찍한 전장의 기억을 들려준다. 자신의 부대가 붙잡았던 중국군 포로를 군도로 처형했던 경험을 들려준 것이다. 그 포로는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최후를 맞이한다. 포로를 척살해버린 기억의 조각은 저자에게 아버지와 동일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만든다.


 이 내용을 읽다보니 하루키가 안데르센 문학상을 받으며 수상 소감 연설을 했던 내용이 생각이 난다.

‘그림자의 의미’라는 제목의 수상 소감 연설에서 하루키는 주인의 피조물이었던 그림자가 주인을 죽이는 내용을 담은 안데르센의 작품 ‘그림자’를 언급하였다. “우리는 침입자들에 대해 높은 벽을 쌓고 타인을 배제하면서 역사를 바꾸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해칠 뿐”이라면서 "그림자와 직접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한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루키가 아버지에게 중국병사를 처형하는 일을 직접 듣고 충격을 받고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되었듯이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은 나 역시 그 기억과 경험의 충격을 공유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삶에 대해 써야겠다고 결심한 후기가 인상적이었다. 가족에 대해서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책무로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썼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요즘인지라 더 인상깊었다. 글 쓰는 사람의 책무에 대해,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었다.

'고양이를 버리다' 라는 아버지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읽다보니 나 역시 어릴 적 고양이와 관련한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그래서 '고양이를 보내다' 라는 아버지와 고양이 이야기를 어본다. (다소 잔인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어릴 적 집에는 늘 고양이가 있었다. 어느 날 어미 고양이는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새끼들이 젖을 떼자 아버지는 새끼 고양이를 달라는 사람들에게 한 마리씩 주게 되었다.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모두 키우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한 마리만 남기고 다른 새끼 고양이들을 다 보내게 되었다. 초등학교가 끝나서 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망에 씌워 골목 안쪽에 사는 동네 아저씨에게 주고 계셨다. 그것도 어미 고양이가 보고 있는 앞에서. 나는 어미 고양이가 불쌍했지만 새끼 고양이를 주지 말라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그 날 이후 어미 고양이는 이틀 동안이나 대문 앞에 앉아서 서글프게 울어댔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다음 날 새벽이었다. 한 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손을 머리 위로 뻗던 아버지는 무언가 물컹한 게 잡혀서 깜짝 놀라셨다. 일어나 불을 켜서 보았더니 머리맡에 있던 것은 죽은 쥐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쥐의 몸통이었다. 쥐의 머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미스터리가 풀렸다. 출근 하기 위해 구두를 신던 아버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셨다. 쥐의 머리는 아버지의 구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자라서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읽고 고양이가 집 앞에 죽은 쥐를 물어다 놓으면 선물의 의미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키우던 고양이 시로(일본말로 시로는 하얗다는 뜻이다) 도 그러했다. 주택에 살던 시절, 거실에 내려갔다가 죽은 쥐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쓰러질 뻔한 적이 있다. 눈처럼 하얀 시로는 죽은 쥐 옆에서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 잘했지?" 라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이다. "어서 칭찬을 해줘" 라며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내가 키우던 고양이 시로 어릴 적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어릴 적 있었던 일은 선물의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보낸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확신은 없다. 고양이는 복수를 하는 동물일까? 여전히 그 날의 일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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