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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윤 Oct 20. 2020

높은 층수에 사는 당신, 권력을 획득하셨습니다

소음이 쫓아오면 더 멀리, 더 높이 달아날 그들이 부럽다

멀리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끄트머리가 보인다. 걸음을 빨리하든 느리게 하든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목적지는 정해져 있기에 아파트 단지 내에 곧 도착한다. 고개를 살짝 들어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언뜻 본 위층 창문이 깜깜해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좀 더 걷다가 다시 올려다보니 달라진 각도로 인해 암막 블라인드 윗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였다. 시간은 밤 11시 30분이 넘었다. 불이 켜져 있다고 항상 뛰거나 쿵쾅거리며  발망치 소리를 내거나 물건을 바닥으로 내려치는 소음이 있을 거라는 확률이 100%는 아니었지만 그 반대도 아니기에 경로를 변경했다. 그대로 아파트를 지나쳐 근처 놀이터 겸 공원으로 갔다. 그냥 들어가서 소음이 나면 나는 대로 견딜 수도 있었는데 괜히 그러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거기서 우리 집을 보며 시간을 죽였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멀찍히서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니 여러 상념들이 떠올랐다.


이 많은 건물들 중에 왜 하필 저기가 우리 집일까. 왜 하필 그런 이웃이 우리 위층에 사는 걸까. 우리 집이 좀 더 높은 층으로 갔다면 층간소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탑층에 살아도 아래층이 내는 소음이 올라와서 힘들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래도 아래층일 때 어찌할 수 없는 소음보다 견디기에 낫지 않을까. 이사를 갔음에도 또 다른 소음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운이 너무나 필요한 일이구나. 좋은 이웃을 만났다면 달랐을까. 내가 지금 이 시간에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있었겠지. 뭘 하고 있었을까. 우리 가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겠지. 우리 집이 당장 더 나은 아파트나 주택이나 환경으로 이사를 간다면 뭔가가 많이 달라졌을까.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걸까.


빌딩 숲 사이 불이 켜진 수많은 차창들을 바라보며 내 자리를 찾아 방황하는 사람처럼, 셀 수 없이 많이 지어졌고 짓고 있는 건물들 중에 나와 우리 가족이 있을 안전한 보금자리는 어디에 있을지 머릿속으로 찾아 헤맸다. 남들도 이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건가 의문이 마구마구 들었다. 


사람들은 밖에서 힘들면 집에서 쉬라고 한다. 일과 일상의 스위치를 분리해 집에 들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라고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마음껏 집에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위층 때문에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안식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위층의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소음 폭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시간과 빈도가 길어지면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몸과 마음이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공간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다양한 소음으로 미친 듯이 우리 집 천장을 울리는 고통이 사람을 너무 지치게 만든다. 사람이 사니까 그래도 고요할 때가 있지 않느냐고, 그러면 좀 괜찮지 않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시끄러운 것보다 당연히 낫지만 몇 년 동안 층간소음에 시달리니 그건 또 그것대로 불안하다. 언제 또 소음이 시작될지 모르고, 조용한 만큼 모았다가 얼마나 어떻게 잔인한 소음으로 우리 집을 괴롭힐지 모르니까. 언제 조용할지 몰라서 더 괴롭다.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소음이 이어지는 날들도 있으니 위층은 존재 자체가 공포다. 물론, 불안해도 조용한 시간이 백만 배 천만 배 낫다.


위층에 사는 사람들에게 본인들의 집은 온전히 휴식처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소음에 대해 큰 이슈로 대응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지금 위층은 아래층을 아예 없는 존재로 무시하면서 지내고 있다. 아파트가 아니라 한 가구 거주 주택처럼 애용하고 있는 둣 싶다. 소음을 피해 계단에 앉아 있으면 가끔 위층 가족 전부 또는 일부가 외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나도 모르고 싶다. 그 시간에 계단이 아니라 집에서 평온하게 쉬고 싶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거나 씽씽카를 끌고 나가거나 작은 손수레를 끌고 나가거나 그냥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집 안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는데 저 중 하나인가? 나는 비자발적으로 쾌쾌하고 냄새나고 추운 계단에 앉아 있는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렇지 않은 대화를 듣고 있으면 현실이 굉장히 우울해지고 나의 처지가 급격히 측은해진다. 위층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없는 척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하니 더 고역이다. 내가 왜 이렇고 있어야 하지? 고통스러운 소음 때문에 계단에 있는다는 말을 쪽지에도 써드렸으나 효과는 전혀 없다. 깡그리 무시당한 것이다. 읽기는 했을까?


아래층이 뭐라고 하든 무시하면 그만이고, 며칠에 걸쳐 쓴 쪽지도 떼어버리면 그만이고, 전체적으로 울리는 방송도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이고, 인터폰을 울려도 없는 척하면 그만이고, 우연히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시치미를 뚝 떼면 그만이고, 다른 이웃들에게는 아래층이 예민하다고 하면 그만이고, 확인할 길이 없으니 온갖 거짓말을 하면 그만이고, 암막 블라인드를 내려 자는 척하면 그만이고, 고통을 호소하면 다양하고 새로운 소음들을 추가하면 그만이고, 죄송하다는 말은 안 하면 그만이고, 신실한 신앙인인 척하면서 아래층은 지옥으로 만들고 천국을 원하면 그만이니까.


위층은 지금도 열심히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우리 집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문 밖에 붙여진 아이가 있으니 벨을 누르지 말아 달라는 스티커가 떠오른다. 초인종 소리가 그리 컸던가? 아이들 소리 지르는 소리가 우리 집 벽을 타고 내려오고 종일 뛰는 소음이 우리 집을 통째로 흔드는데 참 모순적이다. 초인종 소리는 그 소음에 비하면 감미로울 것이다. 애초에 띵똥- 거리는 소리보다 본인들이 만드는 소음에 깨지 않을까. 아니면 그 스티커도 우리 집은 아이가 있어서 조용한데 아래층이 예민하다고 주장할 하나의 방패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요한 잠조차 나와 우리 가족들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데 웃기는 일이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파트 정문 근처에 서서 고개를 젖혔다. 아파트를 끝까지 올려다봤다. 높은 건물, 높은 층수는 권력을 나타낸다. 피라미드만 봐도 알 수 있다. 층간소음을 낼 수 있는 것도 권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층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못된 권력.


'진짜'인 사람들은 애초에 소음이라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겠지? 소음이 쫓아오면 더 멀리, 더 높이 달아날 그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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