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용준 May 06. 2022

<백률사 석당기>, 그리고 종교의 기원에 대하여

 

어린 시절 오래된 절에 다녀간 적이 있다면 천왕문 앞에서 멈춰 선 적이 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는 불교의 수호신, 곧 사천왕이 사방을 수호하고 있다. 한때는 인도의 독립적인 신으로 우러름을 받았을 이들은, 불교의 팽창과 권력화에 힘입어 불교로 흡수되었으며, 그 지위는 신이 된 부처를 수호하는 것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어린이는 절을 왠지 모르게 무시무시한 것으로 여기고 만다. 눈을 부릅뜬 사천왕과 그들이 지닌 여러 무기들, 그리고 사천왕의 발 아래 짓밟힌 요괴들을 보면서, 공포를 느껴 본 적이 한 번쯤은 있지 않았던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가장 먼저 느꼈을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마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느 순간 그것은 무시무시한 것이 되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선사로부터 아직까지도 내려오는 신앙의 대상들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을 만큼 거대하거나 강력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에게서 존경심이라든가 포근함보다는, 공포감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느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공포를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한 것이 종교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설화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삼국사기> 등 사서와 <삼국유사> 등 설화집 모두, 법흥왕 대에 불교가 크게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중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이차돈이라는 인물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스스로 목을 바치겠다고 법흥왕에게 아뢰었다. 그리고는 처형당할 때에, "나는 불교를 일으키기 위하여 형을 받는다. 부처께서 신령스럽다면, 내가 죽을 때에 반드시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 하였다.


물론, 스스로 죽겠다고 나선 이차돈의 행위 역시 두려울만한 것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차돈의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뿜어져 나왔으며, 뭇사람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기고 불교를 비방하는 것을 멈추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삼국사기>가 기이한 일들을 많이 다루지 않았음을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기이한 이야기에 인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는 것은, 단순히 기이한 이야기만으로 치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석당기>는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이차돈의 죽음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돌비석에는, 이차돈의 잘린 머리, 그리고 아직 쓰러지지도 않은 그의 몸통, 잘린 목 위로 뿜어져 나오는 피,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가 묘사되어 있다. 김부식은 아마 이런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는, <백률사석당기>처럼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아마도 김부식은 이 돌비석을 직접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김부식은 이차돈의 죽음에 읽힌 이야기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백률사석당기>에 묘사된 이차돈의 피는 색깔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삼국사기>와 같이 흰 피였을 것이다.



이차돈의 이름은 <삼국유사>에는 조금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는 염촉이라 한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언어는, 이차돈과 염촉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차돈, 혹은 염촉의 죽음은 이 <삼국유사>에 좀 더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법흥왕이 형구(刑具)들을 잔뜩 갖추어 놓고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여기서,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다만, 둘 다 마찬가지로 염촉이 절을 짓는 과정에서 거짓을 지어냈다는 것은 비슷하다. 목에서 흰 젖이 크게 솟구쳐 올랐고, 이날 세상은 갑자기 어둠에 휩싸였으며, 땅은 뒤흔들렸고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뿜어져 나오는 피, 그리고 꽃비. <백률사석당기>의 기록은 아무래도 이 쪽에 어울린다. 그러나, <백률사석당기>의 부조가 먼저인지, 아니면 <삼국유사>에서 소개한 그 이야기가 먼저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한편 <삼국유사>는 또한, 염촉의 머리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는 이설도 싣고 있으니, 앞서 이야기한 염촉의 최후는 더욱 기이해진다. 서라벌에 흐르던 감천이 메말라 물고기와 자라가 앞다퉈 튀어올랐으며, 곧은 나무가 먼저 부러져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두고 인간들은 두려워한다. 지금도 이런 것이 대지진의 전조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과학기술의 발달로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이란 애초에 과학기술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밖에 해소할 수 없는 것인가. 하지만 종교조차도 역시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고, 새로운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가장 오랜 종교 중 하나는 스스로 형성될  때도 그러했겠지만, 낯선 곳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기 위하여는 더욱 두려운 것이 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