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이벤트

by 새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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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면 처음에는 땀이 흐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신체적인 반응에서 생각과 감정의 반응으로 옮겨간다. 반복해서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나를 누르고 있던 무거운 생각들이 하나 둘 벗겨진다. 오늘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가? 10년 뒤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와 같은 무거운 생각들은 몸이 힘들게 되면서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사라진다. 물론 다시 내게 돌아올 것을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내게서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조금씩 가벼움을 느낀다. 비었다가 채워지는 생각의 작용은 때로는 속수무책이지만, 계단을 오르며 잠시 그 속수무책에서 한 발짝 비껴 선다.


과거의 기억은 뇌의 신경회로를 타고 끊임없이 내게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기억은 객관적으로 나에게 나타나지 않고 끊임없이 나의 감정의 작용에 의해 재구성된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재구성한다. 그 유치한 감정이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의 삶을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초라해질 때에도 그 유치한 감정은 다시 등장한다. 계단을 오르며 마음 둘레에 묻은 감정의 찌꺼기가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무겁던 몸은 조금씩 이렇게 덜어내면서 가벼워진다. 그리고 몸과 마음 모두 조금씩 비어 간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감정의 찌꺼기들에 포위당하면서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가치가 낮다고 나는 생각했다.


늘 첫 번째 세트는 몸을 각성시키고, 두 번째 세트는 몸에 에너지가 차오름을 느낀다. 세 번째 세트를 마치면 몸은 계단 오르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는 관성을 장착한다. 다섯 세트를 마칠 무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어깨와 목도 풀어줘서 몸 전체가 균형을 잡고 있음을 느낀다. 일곱 세트를 마친 상태에서는 당장 마쳐도 좋다는 넉넉한 마음이 든다. 아홉 세트를 마치고 아내는 귀가한다. 올해 미뤄뒀던 이벤트를 마음속으로 준비한다.


때로는 나를 위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일상의 삶은 녹록지 않고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힘들고, 즐거운 순간들은 금방 지나간다. 그럴 때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주로 몸을 혹사시키는 이벤트를 즐겼다. 사람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벤트를 만들어내겠지만 나는 이게 나를 각성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서른세 살에 아무 생각 없이 42.195킬로미터를 완주했다. 평상시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지 않은 상태에서 일생에 한 번이라고 30킬로미터 지점에서 같이 포기하자는 옆사람의 조언을 무시하고 5시간 20분이라는 우스운 기록으로 완주했다. 덕분에 2주 동안 아무리 밥을 먹어도 허기진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다지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잘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세트째 계단을 오르면서 오늘은 몸의 상태를 미세한 부분까지 제대로 관찰한다는 마음으로 이벤트를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16세트(368층)를 완주하고 나서는 한 일주일 동안 운동을 제대로 못했다. 이벤트를 하려면 평상시 몸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은 마침 생일이어서 나를 위한 이벤트를 하기에 명분도 몸의 조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4세트를 마칠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15세트를 마치고 나니 오를 때마다 다리가 미세하게 무거워짐을 느낀다. 16세트에서는 미세한 통증이 왼쪽 무릎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17세트에서는 미세한 통증이 오른 무릎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18세트를 마치고 나니 몸 전체가 약간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19세트에는 몸이 약간 방전되는 듯하면서 오히려 가벼움을 느꼈다. 20세트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고 몸 상태를 봐가며 오르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개운한 마음으로 계단 창문을 닫으면서 편안하게 마무리했다.


산을 오른다고 치면 1200미터 정도이므로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으나 약간의 성취감이 밀려왔다. 21층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빛깔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한다. 한 번도 같은 하늘이 아니다. 자연의 변화 속에서 나 역시 늘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아늑하게 나의 몸을 감싼다. 식사를 겸해서 먹태에 생맥주를 마셨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 더 이런 이벤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420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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