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구축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설렘과 즐거움

- 문어 해물탕

by 새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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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음식을 접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흔치 않은 모험 중 하나다. 물론 익숙한 가게와 익숙한 음식이더라도 식재료는 늘 다르다. 어제 내가 먹은 음식의 재료와 오늘 내가 먹는 음식의 재료는 같지 않다. 그 재료가 성장하는 동안 만났던 비의 양과 햇살의 양이 다를 것이며, 바람의 강도도 다를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식재료 깊이 눌러보면 나의 작은 생각과는 다른 어마어마한 자연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대륙에 올라서는 것이다. 그동안 그 대륙을 만들고 가꿔온 음식 장인이 구축한 세계에 내가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평소 좋아하는 선배, 후배님들과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 만난다. 이 가게를 추천한 후배님은 음식에 대한 내공이 깊다. 그래서 사실 온종일 기대가 되었다.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코로나를 만나기 전과 코로나와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이 형식적이지 않다. 진심으로 서로의 안위를 묻는다. 그들의 안위가 곧 나의 안위임을 서로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우울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정성이 오가는 인사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한다.


왁자지껄한 주변 상황이 약간은 어색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이렇게 서로 안심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냄비에 담긴 재료들을 보며 음식에 대한 나의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전복, 홍합, 가리비, 갈비/닭,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문어가 등장했다. 세심한 후배는 양쪽 테이블에 갈비 버전과 닭 버전을 준비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앙쪽 냄비에서 문어들은 꿈틀꿈틀 대며 장렬히 산화하고 있다. 종업원의 가위질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마침내 그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져 국물을 만들어낸다.


나는 국물을 먹는 일을 일종의 의례행위로 생각한다. 막국수나 평양냉면, 칼국수처럼 만들어 내어놓는 음식들은 그릇째로 들어 올려 그 국물을 맛본다. 우려낸 국물은 한 국자를 접시에 옮겨 담아 그 맛을 음미한다. 결혼과 성인식, 장례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 의레행위의 의미와 깊이를 알 길이 막막하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 속 타인이 구축한 국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바로 느낄 수 있다. 국물은 깊고 시원하며 달콤하기까지 했다. 뜨거우면서 시원한 그래서 신비한 국물 한 숟갈에 두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다시 와야겠다고, 그리고 한잔해야겠다고


문어는 질기지 않고 그렇다고 무르지도 않고 적당한 질감으로 입안에서 한동안 놀고 있다. 문어는 어떻게 삶느냐에 따라 그 질김의 강도가 달라진다. 살짝 데쳐놓아 먹기 좋은 질감을 선사하는 것이 핵심인데 그 핵심에 다가가기가 어려운 것 같다. 데친다는 표현은 입에는 당장 와 닿지만 실제로 해보려고 하면 저 멀리 있는 느낌의 단어이다. 역시 적당한 타이밍에 꺼내서 잘라주신다. 그 질감은 더 이상 표현할 길이 없다. 홍합과 시원하다는 동의어라고 생각된다. 물론 홍합살은 아주 고소하지만 홍합이 선사하는 국물의 매력은 바다를 한 모금 마신다는 느낌이다. 그들이 저 푸른 바닷속에서 보낸 세월을 나는 지금 식탁에서 느낀다. 파도가 일렁인다. 배를 타지 않아서 좋다. 배를 타지 않고도 바다내음을 음미할 수 있으니 좋다. 심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꼭 가보지 않더라도 이렇게 바다내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전복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마는 전복살의 부드러움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리고 전복내장의 비릿한 맛을 즐길 수준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는 전복을 즐기는데 필수요소가 아닐까 한다.


음식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먹는 가다. confident는 영어사전에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프랑스어 사전에는 속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절친한 친구로 나온다. 노년학을 연구하신 연세대 교수님은 confident야말로 노년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얘기하셨다.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고 없고 가 행복한 노년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수명까지 좌우할 수 있다고 했다. 내 주변에는 confident가 있는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음식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기 위한 보조수단이자 confident를 만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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