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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Dec 08. 2024

메밀 순 백의 깊은 맛


@1. 맑고 평화로운 어머님 얼굴

어머님 생신이 엊그제였다는 말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히 좋아하시는 사과와 감과 귤을 사들고 가서 상쇄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죄송했다. 햇살이 중정을 사선으로 내리비춰 한결 더 밝은 혈색의 어머님을 옆에서 뵈니 감회가 새롭고 감사한 마음이 스쳐 지나간다. 2020년 1월 7일 생사의 기로에서 위기를 극복하시고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뵐 수 있으니. 오늘은 식사하시는 모습을 뵙고 가게 되었다. 회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다음 주 일요일에 회를 사서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맑고 평화로운 기운이 가득한 어머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시장기가 밀려오는 걸 어찌 눈치채셨는지 얼른 가서 점심 먹으라고 하시자 음식 레이더를 돌렸다. 얼른 떠오르는 가게!! 겨울이지만 100% 메밀 막국수는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정답이다.

@2. 메밀 소바 추억 소환

문득 4월 친구 들고 벳부를 방문했던 기억을 소환했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타고 가는 사이 음식에 조예가 깊고 진심인 친구가 찾아낸 가게로 향했다. 현지인들이 찾는 노포의 위엄이 묻어있는 가게 풍경에 먼저 마음이 갔다. 순백의 빛깔에 대해 친구의 설명에 감탄했다. 그 순백의 메밀면이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입안 가득 퍼지는 메밀향과 미각수용체에 또렷이 새겨진 그 순백의 맛을 잊을 수 없었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었다.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군데 다녔지만 그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했다. 2주 전 도쿄 출장길에서도 그 맛을 만나지 못했다. 순백의 메밀 100%에 담긴 꽉 찬 느낌의 맛을…. 꼭 벳부를 가야 하나?



@3. 순백의 깊은 맛

먼저 따뜻한 면수의 부드러움을 맛본다. 구수함과 고소함 사이의 명확한 경계지점에 그 맛이 위치한다. 입안이 개운해지고 몸 안의 세포들이 워밍업을 하고 있음을 상상한다. 물막국수를 받아 든 순간, 예전에는 내가 왜 이 빛깔을 제대로 몰랐을까? 왜 다른 메밀면들처럼 회색으로 생각했을까? 오늘 보니 순백의 빛깔, 그 빛깔을 한참 음미한 후, 서두르지 않고 국물을 한 입 머금는다. 은은하고 깊은 국물맛이 입안의 잡내를 정리 정돈하고 순백의 메밀맛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조금씩 조금씩 먹는다. 사리를 미리 추가해 놓았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 15분이 지나야 한다.


적당한 포만감과 맛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맛있게 먹는 것만큼 중요하다. 해마에 새겨진 그 기억이 다시 소환하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이 지속가능한 삶의 즐거움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열무와 무채는 면에 집중하지 말고 여유를 갖도록 유도한다. 음식을 먹는 차원에서 음식이 스며드는 차원으로 한 단계 진화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면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생각이나 잡념이 없다. 면의 맛에 집중한다. 1910년 월레스 와틀즈가 쓴 책 <건강해지는 과학적 방법>에서는 '진실로 획득된 배고픔'이 식사의 조건이고, 음식을 먹을 때는 오직 맛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오직 맛에만 집중한다.


빈 그릇의 시원한 공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 음식에 깊이 감사드린다.


맑고 평화로운 기분이 얼굴 가득 동심원처럼 퍼지고 있음을

화장실 거울에서 확인하고 즐거움 하나를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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