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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아빠 Oct 24. 2023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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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 6. 4.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 윤동주


  이 시는 산상수훈이라는 명칭으로 유명한 마태복음 5장에 수록된 예수님의 말씀, 일명 '팔복(八福)'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첫 행을 몇 번 반복하는지만 정신 차리고 있으면 쉽게 암송할 수 있는 간단한 내용이기에 폼 잡기 좋겠다 싶어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시는 점점 나를 고민하게 했다. 슬픔에 관해서 말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자 했던 윤동주는 왜 '슬픔'이라는 개념에 집착했을까? 독립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자신이 믿는 종교의 지도자라는 작자들은 항거는커녕 일제에 굴종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당시의 절망만을 시에 담은 것일까?


  시가 표면적인 개념만을 나타내지는 않음이 분명할 텐데, 그 내면에 무언가 생각할 것이 있을 텐데, 그리고 - 독자반응비평적 관점에서 보자면 - 시는 결국 독자가 완성시키는 것일 텐데... 이러한 마음으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유추해보았다. 그러기 위해 먼저 생각한 것은 인간이 언제 슬픔을 느끼는가 하는 것이었다. 얻기보다는 잃었을 때, 만남보다는 헤어질 때, 건강하기보다는 아플 때, 이겼을 때보다는 졌을 때, 배부를 때보다는 배고플 때, 등의 상황일 것이며, 이는 인간이 상실, 이별, 아픔, 빈곤, 걱정, 외로움, 상처와 같은 단어의 감정과 마주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경의 본문, 즉 팔복에서 '슬픔'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애통'이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도 자주 애통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나사로의 죽음에 애통하셨다.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살리시긴 했지만 그 직전에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애통해하셨다. 타락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애통하여 우셨다. 또한 예수님은 수많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자신의 죄를 민망해하는 자, 고통과 차별에 상처받은 자, 정죄당하여 애통해하는 자, 특히 육신과 정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믿는 기득권층의 손가락질에 상처받는 자들 곁에 함께 하셨고, 위로하셨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성경의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모범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하셨다.'


  이제 나에게 다가온 이 시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말은 '영원히 위로를 받을 것이요'라는 말로 치환된다. 슬플 때마다 그 말씀을 기억하고, 슬픔이 단지 슬픔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님의 위로가 슬픔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암시를 시인은 내포하였으리라 짐작한다.

  둘째, '공감'과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슬플 때 위로가 되는 예수님을 의지함을 넘어서, 우리 스스로가 이웃의 슬픔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를 통해 내 이웃이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는 말은 곧 영원히 이웃의 슬픔을 공감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시인의 다짐이며, 재물과 권력과 사회적 성공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의지와 소망을 천명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셋째, 이 시는 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엊그제 운전을 하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시를 나는 듣게 되었고, 아나운서의 음성을 통해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제껏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던, 막연하기만 했던 그였는데 예수님은 시를 통해 "나는 세훈이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문구가 반복되면 될수록 시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고, 마지막 행은 예수님께서 직접 나를 위해 낭송해 주셨다.


                       ……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훈아, 슬프지? 너에게 복이 있을 거야."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세훈아, 내가 널 영원히 위로해 줄 거야.”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내밀한 내 마음의 뜻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감찰하시고 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시는 그분, 시를 통해 나를 찾아오시고 위로와 확신의 음성을 들려주신 그분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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