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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대한 생각은 갑자기 찾아오기도 합니다.
주말을 맞이해서 을지로 근처에 위치한 카페에 찾아갔습니다. 원래는 혜화역의 '어쩌다 산책'이라는 곳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잡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당분간 영업 정지를 한다는 안내 문구만 있을 뿐, 체념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꼭 다시 찾아갈 겁니다. 사장님.)
아쉬운 대로 다른 카페를 검색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곳보다는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와 비슷한 느낌 혹은 분위기가 나는 그런 장소에 가고 싶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공간이 주는 '정성적인(수치화 할 수 없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카페의 이름이 참 좋았습니다. 한글과 함께 영어와 한자로 적힌 그 단어에는 묘한 끌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이렇게 3개의 조합이 들어가는 문장에는 (뭔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탄탄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한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 뒤에 한자 혹은 영어를 표기함으로써, 뭔가 "자, 혼동이 없게 다른 언어로 부연 설명을 해두었으니 찬찬히 읽어보세요. 이견은 없을 겁니다." 라는 느낌일까요? 아무튼 그런 개인적인 취향에 카페의 이름에도 그런 끌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이곳저곳 실내를 구경했습니다. 이 날은 사람도 적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곳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조금은 세세하게 하나하나 보았습니다. 마치 미술관에 방문을 한 사람처럼요.
그리고 큰 발견을 했습니다. (발견까지는 너무 엄청난 것 같고, 그저 차이를 인지했다. 이 정도입니다.)
'적당'이라는 카페의 이름에는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적당히 해라"의 '적당(適當)'이 아니라 붉을 '적(赤)'과 달달함의 '당(糖)'을 의미했습니다.
어쩐지 팥(Red Bean)과 관련한 음료가 다 있구나 했더니, 그런 부분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 적당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이라는 단어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생각을 잊어버릴까 봐, 메모장을 열어 하나하나 기록을 합니다.
언제 쓰일지 모르는 하나의 소재로써 혹은 하나의 연관으로써.
이번 에세이의 전체적인 맥락을 차지하는 것이 1화에서 말한 '평균율의 삶'인데 때로는 '적당'과 '평균'이라는 단어가 서로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 미묘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찌 됐던 양 끝단의 극이 아니라 적절한 한 곳에 수렴한다는 그 느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러면 나는 이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런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조금은 추상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질문에 '그럴듯한 답변'은 없습니다.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갈 뿐입니다.
그렇게 이 글도 시작을 했듯이, 그 끝도 열린 결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적당은 '두 가지 뉘앙스(Nuance)'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어이, 고대리 좀 적당히 해. 이러다 큰일 나겠어" 와 같이 긍정의 적당함입니다. 필요로 하는 수준을 초과해서 열정을 다 할 때, 듣게 되는 적당함으로 무언가를 요구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보기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어이, 고봉수 적당히 좀 해라. 진짜" 와 같은 부정의 적당함입니다. 이는 무언가를 하는 것에 있어 혹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충분치 않는 결과를 낸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일 또는 사람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수준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한 결과물일 것입니다.
이렇듯, 긍정의 적당함이 '초과'와 관련된 것이라면 부정의 적당함의 '미달'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분법적인 예시와 생각에, 그 중간으로써 다양함이 빠진 것 같아 내심 불안하지만 적어도 그 ‘뉘앙스’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이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초과'와 '미달'이라는 기준은 제가 설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요로 하는 수준'을 요구한 상대방이 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요구한 적당함이 100이었다면 저는 80을 하든, 99를 하든 똑같이 미달의 영역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요구한 적당함이 50이었다면 저는 당연히 초과의 영역에 무사히 안착한 고대리가 되었을 겁니다.
저의 열정은 '한결같이' 80과 99에 머물러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그 '결과물'은 너무나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음가짐을 달리 합니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려고 글을 써 내려갑니다.
"미달과 초과 사이에 있는 적당함을 찾아서 움직이는 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시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저의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저 스스로의 적당함을 찾아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나름의 이해를 가정한 적당(適當)함은 그런 의미에서 평균의 시선과는 그 결을 달리합니다. 그렇다고 평행선으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서로를 보완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양 끝단에 위치한 것에서 기준을 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평균을 바탕으로 그 시선을 갖는 것이 시작이라면, 이렇게 시작된 기준에 "알맞게 혹은 적절하게 나아가고 있나요?" 라는 질문에는 '적당함'이 그 대답을 대신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정한 적당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나아가는 우리의 포물선이 꽤 괜찮고 혹은 그 궤적이 아름답다면 그 자체로 우리는 적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필요 수준을 위해서 움직이는 '적당한 저는' 없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적당한 삶을 사는 것에도 그리고 적당한 나를 유지하는 것에도 그 과정을 천천히 지나가는 우리의 궤적이 꽤 아름답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