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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9년 전, 대학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각이나 결석을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정해진 수업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확고한 성향은 직장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성향을 덜컥 가지게 되었는지, 그 시작을 알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제 성격에는 꽤나 잘 맞습니다.
그날도 친구와 밤늦게까지 과제를 하고 자취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물론 내일의 수업을 위해 알람을 단단히 맞춰두고 내심 든든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오전 9시 수업이라서 알람을 여러 개 맞춰두었기 때문입니다.
"오전 9시 35분"
이상한 느낌을 직감하며, 확인한 시간은 무려 35분이 지나있었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난감한 상황에 대충 준비를 하고 캠퍼스까지 미친 듯이 뛰어갔습니다.
달려가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왜 알람을 듣지 못했을까? 말도 안 돼" 라는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아무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각이라니"
늦어버린 수업을 마치고, 과제를 하러 과방으로 올라갔을 때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알람을 아무도 못 들을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다며 인사겸 말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인사와 함께 돌아온 친구의 대답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저에게 있어 충격적인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안 깨운 건데? 지각 좀 해봐야 돼 너는, 이게 다 선물이야."
당황한 걸 넘어서 이 경험을 저에게 선물해준 거라는 친구의 당당함이 더 황당했던 것 같습니다. 지각이 선물이라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리고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그런 이상한 말이었습니다.
(친구와의 관계를 걱정하실 수도 있어 TMI로 말씀을 드리면, 이 친구와는 가끔이지만 만나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소중한 친구에요. 저에게는요.)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 날의 경험이 저의 이런 성향을 완벽하게 바꾸거나 바뀌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결과론적으로 평소의 저라면 하지 않았을 ‘경험’을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지각이나 결석을 가볍게 여기는 친구가 이상하듯, 친구에게는 이런 정해진 시간에 목숨을 거는 제가 이상해 보였을 겁니다. 아마도 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이해의 폭도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만의 영역’에서, 친구는 ‘친구만의 영역’에서 우리는 서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그 영역이 서로 침범을 하고 또 때로는 완벽하게 평행선을 달리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영역을 친구의 영역으로 침범하게 해 준 그 날의 경험은 다르게 보면 친구의 말대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혹은 그렇게, "우리는 각자가 지닌 영역을 가지고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가벼운 상상을 합니다.
제가 가진 영역이 촌스럽고 혹은 쿨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저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아 아닙니다. 무엇을 꼭 하지 않고 있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영역으로 그리고 저만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테니까요.
그게 지금의 저와 꽤 잘 맞는다면, 그거 하나로 충분합니다.
■ 평균율(平均率)의 삶에 대해서
이번 에세이의 주제로 정한 '평균율'은 단어 그대로 '평균의 비율(The average rate)'을 의미합니다. 순우리말로는 '고른율'이라고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른'이라는 단어가 참 정갈해서 어떤 것을 사용할지 꽤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제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평균율(平均率)'로 정했습니다. 지금도 내심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어찌 됐든 평균의 비율은 그대로입니다.
제가 써 내려가고 싶은 내용은 그런 것입니다. 평균에 관한 것. 단어 그대로입니다.
흔히, 우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정반합'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하나의 주장인 '정'에 모순되는 반대의 주장인 '반'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으로 수렴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끝과 끝을 염두에 두고 그 사이에 있는 적절한 ‘합의점’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친구와의 일을 예시로 들면, 지각을 하면 안 된다는 저의 주장은 '0분'이고 지각쯤은 어느 정도는 괜찮다는 친구의 주장은 '35분'입니다. 그러면 이 주장의 적절한 합의점은 0분과 35분의 평균인 '17.5분'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0.9분도, 17.5분도, 35분도 모두 지각이기 때문입니다. 즉, '합'의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은 저와 저의 반대편인 누군가와의 적절한 합의점이 아니라 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래야만 제가 가진 성향이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하게 지켜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관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선이 있다면 동일한 힘 혹은 영향력을 가진 악이 있듯이, 이는 대칭의 문제로만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가진 시선을 평균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를 중심으로, 양 끝단에 펼쳐진 스펙트럼에서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위치해있느냐?" 를 보는 것이 조금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저를 위해서는요.
이런 이유로 "평균율(平均率)의 삶"을 사는 것, 그런 시선을 가지며 일상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선을 두고 사물, 사람 그리고 일상에 대해 글을 써보고자 마음을 정했습니다.
평균의 시선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지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가지고 있던 망원경에 '새로운 렌즈'가 생긴 기분입니다. 그리고 아마 저는 한적한 공간에 망원경을 세워두고 주변을 살피고 있겠죠?
그리고는 적당한 사물 혹은 대상이 나타나면 새로운 렌즈를 통해 바라볼 것 같습니다.
렌즈 안으로 들어오는 무언가가 어떻게 맺힐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관찰을 하며 그 실감을 기록하고, 정리하고, 해석하며 이렇게 글을 쓸 것입니다. (상상을 통해 생각해보면 꽤 즐거운 과정일 것 같아요.)
다시 만든 새로운 공간에, 어떤 글들이 담길지 기대도 되면서 동시에 "내가 곧 평균이다!" 라는 괜한 아집으로 수렴하진 않을지 고민도 됩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이 순간에 느껴지는 감정에는 저만의 확실함도 어딘가에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그 확실함이 추상적이고 지금 당장 손에 잡히지도 않겠지만, 새로운 렌즈를 가지고 글을 쓰면서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평균의 비율이 부디 누군가와의 거리를, 그 간격을 아담한 공백 속으로 흘러가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이렇게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