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일주일이 채 안 돼서 또 욕일기를 쓴다. 거듭, 나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폴란드에 왔다. 하지만 어학원을 다니는 바람에 결국엔 남동생과 같이 나와 도시에서 유학 중이다. 우리는 크라쿠프에 있다. 폴란드인들조차 휴가 오는 내륙의, 아름다운 관광도시이다.
나와 남동생은 4살 차이가 난다. 그는 한창 학교에 다닌다. 석사 중이다. 여서 일곱 살 때부터 그림 그리라고 종이 주면 유혈 낭자한 살수대첩 같은 것만 그려서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역사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자주 가장 성공한 교육의 예로 그를 들곤 한다. 각설하고,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다. 말을 하기 위한 배경 지식 같은 거다.
우리는 집 근처 헬스장을 끊어서 다닌다. 평생 안 할 일인데, 요 근래 전 세계 모든 이십 대 남자 애들처럼 헬스에 꽂힌 그가 설득했다. 누나 이제 관리해야지. 아주 볼품없어. 옳다, 네가 옳다. 이제 한 4개월 되어간다. 간 날을 합치면 한 달보다 적지만 매달 5만 원씩 내고 있다.
지난 월요일에는 큰 마음을 먹고 오랜만에 헬스장에 갔더랬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무리 집구석을 뒤져도 에어팟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1분 전까지 어딘가 시야에 걸쳐있던 것 같은데 돌연 사라져 버렸다. 에어팟을 곁눈으로 보고 '충전시킬 때가 된 것 같은데. 하지만 어젯밤 핸드폰 충전을 안 시켰으니까 아직 아니야' 같은 생각을 분명 했던 것이다.
한참을 찾다가 학교 늦겠다 싶어서 일단 길을 나섰다. 걸으며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월요일에 헬스장에 분명 들고 갔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 기억이 안 났다. 아이폰 Find my 어플로 보니, 아니나 다를까 헬스장이 마지막 위치로 찍혔다. 헬스장에 전활 걸었다. 없댄다. 이따가 와서 한 번 직접 찾아보란다.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공강인 남동생에게 혹시 헬스장에 갈 거면 누나를 대신해서 좀 찾아봐달라고 했는데 매일 가던 새끼가 오늘은 또 가기 싫댄다. 결국 내내 에어팟 생각만 하고 앉아있다가 학교가 파하자마자 헬스장부터 갔다.
없었다. 탈의실 사물함 문을 모두 열어보아도 내 작고 동그란 에어팟은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보다는 화가 났다. 나는 지금껏 두세 번 헬스장에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주우면 그냥 낼름 갖는 것이 이 헬스장의 도덕 수준인 듯했다. 저 매니저들도 한 패야. 이 날강도들! 그러나 사실은 그 사람들은 죄가 없다! 내가 잃어버리는 만큼 내 남동생이 남자 탈의실에서 매일 무언가를 훔쳐온다. 그냥 덜렁이 깜빡이들이 바보인 것이다! 잘 챙겼어야지!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왜 이러고 살까!
같은 생각을 수억 번 하며 집에 돌아왔다. 화가 나서 빵도 두 개나 샀다. 폴란드 도넛 퐁첵, 복수니까 퐁츄키였다. 도넛을 먹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장을 뒤져보았다. 그러자 아침에 입었다 벗은 바지 주머니에서 작고 소중한 에어팟 3세대가 만져졌다. 아마 에어팟을 보고 무의식 중에 일단 넣고 본 모양이다. 아휴, 아휴, 아휴... 기쁜 한편 짜증이 절로 났다.
창피해서 당분간 헬스장은 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울화통이 터지는 일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이유에선가, 극도로 소심해졌다. 아마 25살이 기점이었던 것 같은데, 아주 재밌게 동아리 생활도 하고 대학생활하다가 불현듯 어느 날엔가, 잘 모르겠다, 무언가 쌓여서 갑자기 성격이 확 변해버렸다.
친구들이 열심히 사회성 훈련도 해주었지만, 지난 2년 사이에는 날이 갈수록 음침함만 깊어졌다. 연애 실패 - 그리고 도망하듯 외국에 나와서 살게 된 것 - 가고 싶었던 학교에 떨어진 것(N번째) - 아니더라도 계속 피칭하고 선발되어야 했던 지난 몇 년이었던 것- 복잡 다난한 가정사, 장례식의 연속- 모두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러다 결국엔 친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대화하는 것-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마저 불편한 지경이 되었다. 어딜 가나 어색하게 존재했다. 깊이 섞이질 못하고.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외국엘 온 걸까?
개 중 내 음침함의 절정은 성인 남자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웃지 않는 그 얼굴. 고고한 그 얼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는 듯 오만한 그 얼굴들에 기가 질려버렸다. 뭐가 나를 꾸욱 눌러서 속이 부글부글했다. 어렸을 때 아빠에게 맞아서 그런가? 근 몇 년 나를 부리고 평가한 이들- 교수님, 작가님- 선생님, 위원장님, 팀장님, 전부 남자여서 그런가? 어떤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일 뿐인가? 혹은 그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 뿐일까?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외국에 있는 김에 온갖 창피한 짓은 다 하고 병을 좀 고쳐보고자 노래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올해 테마는 '죽어도 안 할 법한 짓만 하기'였다. 여기서 만난 주변 사람들이 영감을 주었다. 아주 되바라지고 용감한 미국 여자 두 명을 만난 것이다. 대마를 피고 히치하이킹으로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들이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은 언어를 배울 때 "혹시 모르니까" 목표 언어의 대중가요를 한두 개쯤 외우고 다닌다고 한 것이 나를 감동시켰다. 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들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마저 하겠다.
어쨌거나 용맹하게 가입한 노래 동아리는 매번 학기 말에 콘서트를 연다. 선생님이 미리 말해주기는 했으나, 나는 어학원에서 하는 동아리가 뭐 얼마나 제대로겠나 하는 안일한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노래는 도구요, 폴란드어를 배우기 위해 하는 수업의 일환 아닌가. 같이 뭔가 가사를 통해 공부하고, 그러면서 친해지고, 폴란드어 노래도 좀 알고... 뭐 그런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가수가 꿈이었던 우리 선생님이 뭔가 한을 풀어보고자 꾸리는 자리였다. 한 학기 내내 무언가 노래 못 하는 사람, 즉, 나와 어느 불쌍한 중국인 아저씨를 향한 불편한 압박이 있긴 했는데- 이것을 풀어보려고 같은 수강생 한 분이 유구히 애쓰신다. 고마워요!- 오늘, 마지막 연습에서야,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콘서트에 진심인지, 뒤늦게 이해했다. 무슨 어학원 재롱잔치에, 재롱잔치도 아니고 예행연습에 오케스트라를 부르냔 말이다. 콘트라베이스에 건반 기타 바이올린이 왔다. 나는 죽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 새끼가 노래를 제대로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이 두 번 듣고 두 번 따라 부르면 그게 오늘 수업 끝. 박리다매 권법이라 그런 식으로 하루에 한 두 세 곡씩 배워왔다. 심지어 폴란드어의 폴도 안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냥 주먹구구 소리 나는 대로 불러야 한다. 우리 선생님은 오로지 콘서트, 그 세트 리스트를 짜는 데만 관심이 있고 가사 공부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열심히 한국어로 음차 했다. 노츠프셰크레,예,약콘차, 시비아타, 시비아트, 보바비네프세드, 시비, 타아아아니에엠.
자꾸 욕이 나온다. 그는 내게 목소리를 더, 더 높여야 한다고, 강하게, 몇 번이나 얘기한다. "너는 소리를 못 올리는 사람이 아니야, 너 스스로를 네가 막고 있을 뿐이야." 아니 제가 명창이 되고자 이 수업에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만...안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하나. 갑자기 일주일에 한 시간, 당신 주먹구구 수업을 7번 듣고 30년 동안 안 나오던 보컬이 뚫리면 세상에 보컬학원은 다 없어져야 한다.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다. 도망칠 기회가 종종 있었을까? 내가 놓친 걸까? 알게 모르게 이상한 오기가 있었나? 일단 콘서트는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겨우 찾은 에어팟을 꽂고 눈물을 흘리며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목이 아플 때까지. 자신감은 연습에서 나온다는 말을 되새기며. 아마 나는 내 이웃들을 상대로 이미 무반주 콘서트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 누가 뭐라고 하는 거에 주눅 좀 들지 마! 그냥 하면 해! 뭐 어쩔 거야, 죽기라도 하냐?
그리고 있는데 도서관에 갔던 남동생이 돌아왔다. 창피해서 황급히 노래를 껐다. 남동생은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세계 최고의 노트 앱을 찾았다는 것이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가, 이 앱에 매료돼서 몇 시간 내내 이 앱만 만졌댄다. 그래 뭘 했느냐 물어보니, 인물도감을 작성했다고 한다. 자기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캐릭터를 분석하고 대응 방안과 전략을 구상하는 작업이랜다. 한 번 더, 그는 가장 성공한 교육의 예이다.
너무 자랑스러워하길래, 한 번 봐줬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첨부한다.
악플도 이렇게까지 정성으로는 안 달 것 같다. 장차 크게 될 위인은 아님.
항상 먼저 지갑을 열고 진심으로 대하였으나 아직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아마 남동생의 욕일기 같다.
저 해시태그가 너무 열받는다.
내 친구의 친구, 그러니까 말 그대로 지인도 인물도감에 넣어 놓았다. 딱히 아는 사이도 아니고 얼굴 딱 한 번 봤는데. 성격 및 특징, 분석 필요. 대응 전략, 연구 필요. 내가 봤을 때는 총평을 적고 싶어서 굳이 넣은 것 같다. 게이에게 남색을 즐긴다, 는 과연 적절한가?
이것 말고도 정말 말도 안 되는 항목이 많다. 예컨대 이야깃거리 항목에는 음담패설(폴란드어와 한국어로), 맞짱 뜬 썰 등이 있다. 혹시라고 그가 빨리 죽으면 내가 책임지고 이 앱을 지워 준다고 하니, 그러지 말아 달라고, 자신은 일부로 기록을 남기려고 한 것이란다.
앱 이름은 옵시디언이다. 나도 한 번 써봐야겠다. 재밌어 보인다. 그래, 그럭저럭 즐겁다. 아주 웃긴다, 웃겨. 남동생까지 가담해 나의 세계 멀미를 돕는다. 이 어지러운 세상. 요상하고 야릇한 인생.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엉뚱하다, 엉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