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길
지난번에 이어 또 이주 짜리 단기 알바를 하게 되었다. 역시나 생산 공장일이다. 다행히 몸 쓰는 건 아니다. 그럴 체력도 이젠 없다. 짧은 통역 겸하여 교육 자료를 좀 만들어드리러 간 건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이것 또한 대단히 충격이다.
엔지니어들이 장비 점검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영상을 찍어 몇 십 번 돌려보아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똑같은 걸 물어보고 또 물어보다가 이제는 무서워서 못 물어보고 있다. 곧 한 대 맞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어려서부터 아주 간단한 기계 장치조차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가 잘 안 갔다. 뇌가 좀 생기다 만 모양이다. 그리하여 결국 오늘 아침에는 멍하니, 노트를 펴고, 뭔가 다른 걸 해보려다 결국 낙서만 했는데 네모, 네모난 칩, 네모난 투입구, 네모난 엔진과, 네모난 버튼, 같은 것들만 계속 그리었다.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세상이다. 우리 시대 말이다. 예전에, 밀란 쿤데라인가 누구인가가 오늘날 우리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장치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그랬는데, 뜻밖에 이곳에서 말 뜻을 체감한다.
바보인 것을 어떻게 하랴. 나름대로 고등교육 길게 받고 나와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는 것이 창피해서, 또 척척 모든 것을 해내는 그 엔지니어들이 너무나 대단해 보여서, 토요일 아침나절 내 지난 시간들은 뭐였나, 잠시 되돌아보았다. 아주 긴 연설을 머릿속으로 만들어냈는데, 그 사람들이 혹시라도 지금까지 뭐 먹고살았냐, 무슨 공부를 그렇게 오래 한 거냐(이 간단한 일도 못하면서) 물어보면 대답해 주려고. 그런데 전혀 근거도 없이 "그게 돈이 돼요?" 라거나 "그걸로 먹고살 수 있어요?"라고 비난받을 것만 같았다. 어찌 둘러대도 그냥 사회부적응자 아니었을까.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말마따나 시집 밖에는 답이 없는데, 결혼시장에서도 찌꺼기 취급만 받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고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그냥 살아야겠다.
공장은 무척 빠르게 돌아간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근처 동네에서 온 남자아이는 대충 스무 살 되어 보인다. 관리자가 지켜보다 말을 부탁한다. 속도 못 높이냐고 물어봐주세요. 그러며 그는 속도를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도 알려준다. 나는 말을 옮기다가 민망해진다. 남자아이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방법을 몰라서 천천히 일하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연하다. 그 옆의 같이 온 여자아이는 눈치를 보며 더욱 열심히 일한다. 분명 다리도 아프고 집중력도 떨어질 텐데.... 어쩔 수 없이 그럴 텐데...
나중에 가서 괜히 사과한다. 너를 압박하는 건 아니야, 그냥 그게 그 사람 일이니까. 힘들면 말해도 돼(사실 안 될 것 같지만). 남자아이는 다 이해한다고 해준다. 조립실에서 어떤 여자가 쓰러졌다는데, 왠지는 모르겠다. 더워서? 조립실은 뭐 때문에 에어컨을 못 튼다고. 뭐 때문에 뭐가 어떻다고 그래서. 정말 제대로 이해하는 게 거의 없다.
폴란드 초대 대통령은 노동자 출신이었다.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리더라고 한다. 동생과 저번날 갔던 그단스크가 바로 그 노동운동의 요람이자 격전지였는데, 자부심이 엄청나다. 도시 자체가 빨간색이다. 진짜로... 러시아 공안들이 사람을 향해 총을 쏴도, 납치해서 죽여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생목숨까지 걸었다. 하도 잔혹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많았어서 아그네슈카 홀란드가 영화로도 찍었다. <To kill a prist>. 그런데 영화는 별로다. 어쨌든. 그러니까 폴란드인들에게 노동권의 침범이라는 건 계엄이랑 비슷한 게 아닐까?
이런 나라에서 한국인들이 공장을 돌리려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폴란드 혹은 그 이웃 나라 노동자들을 욕하지만 "게을러터졌어!" "그러니까 탱크도 못 만들지", 실은 동아시아 가부장제가 너무, 너무한 것 같다. 60살도 전에 요절하는 관식이의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야근. 성실함. 책임감, 자기희생- 혹은 학대... 가엾다, 가여워. 일하는 아저씨들 얼굴이 다 새카맣다. 입술은 파랗다.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집에 있는 여우 같은 마누라, 토끼 같은 자식들 얼굴을 떠올릴까?
필리핀 아저씨들과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좀 나누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무슨 무거운 걸 옮기는 일을 한다는데, 70킬로쯤 된단다. 얼굴은 이미 파파 할아버지들인데 내게 아주 공손하게 대해주신다. 나도 민망해 자꾸만 써, 미스터, 젠틀맨, 이렇게 부른다. 아저씨들은 평생 이 나라와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장 일을 했단다. 10년 20년.... 그렇기도 하구나, 새삼 신가 하였다. 그렇게 철새처럼 움직이며 살면, 꿈에서 헷갈리지 않나. 나더러 예전에는 어디서 일했냐길래, 그냥... 연구소 같은 데서 에서 좀 일했어요. 하니까, 깔깔 웃는다. 그리고 공장으로 온 거야? 깔깔. 나도 웃기다. 내가 여기 안 어울린다는 걸 나도 안다.
또 한편. 내가 좀 순진했던 것 같다. 내가 너무 나 보기 좋은 것만, 나 하기 좋은 일만 하고 살았나 보다. 슬프다. 오늘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