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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Jul 08. 2019

천공의 성, 그 오묘한 분위기는 어디서 찾죠?

치비타(Civita)

     로마 시내를 벗어나서 이탈리아의 남북을 연결하는 A1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다. 지형적 유사성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직접 와서 보고 많은 참고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이용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시작점에서 표를 뽑는 것도 요금을 내는 곳도 매우 친근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표를 뽑고 요금을 내는 정산소에서부터 메인 도로까지의 거리가 굉장히 짧다는 것이다. 갓길로 주행을 하면서 속도를 올려서 메인도로에 올리는 개념이 아니라 표를 뽑고 원을 고작 반 바퀴 정도 돈 것 같은데 바로 주행도로로 입장을 해야 한다. 갓길의 거리도 상당히 짧다.


     나가는 곳도 짧아서 급서행하는 차들의 영향으로 (나갈 때는 시속 40km까지 서행해야 하는데 이 위치에 단속 카메라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2차선이 갑자기 서행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나들목에서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탈리아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도 크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1차선은 꼭꼭 추월차선으로만 이용해서 우리나라 고속도로보다 운전하기 더 안전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큰 버스들도 앞 차를 추월하기 위해 뒤차 가까이까지 가서 잠깐 1차선으로 이동해 추월을 하고는 냉큼 2차선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는데 나중에는 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2시간 정도 차를 달려 치비타(Civita)에 도착했다. 바뇨레조(Bagnoregio)마을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유료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사람들도 바글바글하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어서 그런지 가족단위로 놀러 온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다. 간신히 차를 대고 현실판 천공의 성이라 불리는 치바타를 향해 걸어가는데 이제는 먹구름까지 몰려온다. 어제 여름 같았던 그 날씨는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미스트랄'을 능가하는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언덕 꼭대기에 작은 마을이 천공의 성처럼 떠있는데 언덕 아래 계곡은 바람과 비의 풍화작용에 의해 점점 깎여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마을 입장료인지 다리 통행료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유료!) 다리의 길이가 제법 길고 가파른 낭떠러지를 가로지르는 다리인지라 난간 가까이에 서면 꽤나 아찔하다. 거기다 칼날 같은 미스트랄이 한번 불면 몸이 휘청이며 금방 다리 가장자리로 밀려날 것 같다. 한겨울 같은 추위가 느껴진다. 다리에 서서 치비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는커녕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건너가기 바빴다. 다른 사람들도 바람에 같이 휘청거리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뛰어간다.

     마을 중심에 작은 교회가 있고 그곳을 기준으로 금방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다. 작은 골목이 오르막 내리막을 이루고 골목골목 레스토랑들이 제법 많다. (그런데 모두 이미 만석이다.) 트러플 파스타로 유명한 곳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갔는데 레스토랑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고 웨이팅도 넘쳐나서 브레이크 타임이 오기 전에 앉을 수 없다고 이제 웨이팅도 받아주지 않는다. 아쉬움과 함께 간단한 빵과 커피로 점심을 때운다. 도시를 벗어나면 훨씬 한적할 줄 알았는데 이 작은 절벽 위의 성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는 실패했지만 골목마다 예쁜 꽃들을 구경하고 작은 상점에서 스노우볼도 하나 기념품으로 샀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치바타에서 서둘러 빠져나왔다. 결국 굵어진 빗방울을 맞고 뛰다가 바뇨레조 마을의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치 로마 사람들이 5월 공휴일을 맞아 죄다 적절한 거리의 이곳으로 놀러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교토에서는 단풍구경을 나온 일본 할아버지, 할머니를 원 없이 봤다면 천공의 성의 오묘한 분위기를 느끼는 대신 이탈리아 가족모임을 실컷 보고 온 기분이다.


     예약해 둔 농가민박(agriturismo)으로 출발하자마자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을 보랴 빗방울 사이로 초행길 파악하랴 피곤한 운전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크게 헤매지 않고 성공적으로 잘 도착했고 성을 고친 민박이라 규모가 제법 컸는데 멀리 구석에서 일하고 있는 주인아주머니도 잘 찾아서 체크인도 마쳤다. 점심이 부실했던지라 너무 배가 고파서 짐을 풀고 옷을 조금 더 따뜻하게 입고 바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본다.

     옷을 도톰히 입고 나오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차 위로 그림 같은 무지개도 떠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선명한 무지개였다. 폭우를 뚫고 눈을 부릅뜨고 운전하느라 지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오늘의 고생들로 이번 여행의 악운은 끝이 났다고 앞으로는 좋은 날씨와 행복한 여행을 즐기기만 하라고 약속해주는 무지개인 것 같아서 금세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인생의 위기를 잘 넘기고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고비나 우울을 잘 헤쳐 나오고 나면 언제나 따뜻한 위로가 있었던 것 같다. 힘듦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 너무 괴롭지만 날의 무지개가 생각나면 고비의 끝에는 또 따뜻한 위로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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