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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 Jul 21. 2019

밀밭이 선사하는 평온함

토스카나(Toscana)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농가민박인 성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구릉 위에 위치한 곳이 아니라서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 한 장에 이끌려 온 토스카나의 평원, 그 한가운데 내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주인의 정성이 느껴지는 장미와 레몬나무를 보며 성 뒤편으로 가니 밀밭이 바로 코 앞이다.

     아침 이슬을 가득 머금은 밀을 가만히 관찰한다. 쌀과는 사뭇 다르게 생겼다. 쌀은 줄기에 여러 개의 낱알이 옹기종기 모여 붙어있다. 반면 밀은 생각보다 낱알의 크기가 컸고 줄기에 하나씩 달려있었다. 벼농사는 협동이 필요해서 집단주의 성향이 발달했고, 밀농사는 혼자서도 가능해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농촌은 한가운데 집들이 모여 있고 옆집의 숟가락 개수도 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공동체를 중시하는 반면 이곳은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 차 없이는 다른 집에 방문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모습이 재배하는 작물에도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그 사진 한 장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출발한다. 날씨가 좋아져서 햇살은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에 따라 밀과 보리가 일렁이는 녹색 물결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대가 제법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산퀴리코도르차(San Quirico d’Orcia) 평원의 전경을 볼 수 있었고 그곳에 오르기 위해 어제의 비로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생긴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JEEP 차량을 빌려준 렌터카 직원에게 감사의 축복을 날리며 오프로드 어드벤처를 하는 듯 물웅덩이를 가로지르며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려 올라갔다.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잘 그려진 파형 그래프처럼 평야와 구릉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토스카나 풍경에 상징성을 부여한다. 눈앞의 풍경이 모든 것을 잊게 만들고 마음을 한없이 평화롭게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집으로 나와 유명해진, 밀밭 한가운데 농가가 있고 그 앞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장난감 병정처럼 줄지어 서있는 곳에 갔다. 농가 민박(Agriturismo Poggio Covili)도 겸하고 있는 그곳에 묵어보고 싶었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어서 그런지 예약이 쉽지 않았다.

     하늘을 향해 끝없이 뻗은 길고 가느다란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에 서니 순식간에 거인국에 온 쪼꼬미가 된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만든 소실점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 본다. (걷는 것 참 싫어하는 나도) 어디까지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으로 괜히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일렁이는 평원의 풍경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면 이곳은  왠지 희망차게 뭔가 기운이 나게 만들어준다. 비슷한 토스카나의 풍경에서도 이렇게 다른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 놀랍다.

     

     토스카나의 4계절이 궁금하다. 프로방스에서 1년 동안의 이야기를 계절감 있게 달별로 엮어낸 '피터 메일'의 책처럼 <토스카나에서의 1년> 같은 책이 있으면 좋겠다. 인생은 길고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이므로 내 삶에 어쩌면 그런 기회가 찾아올 수 있지도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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