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평원의 흥분을 간직한 채 움브리아주(Regione Umbria)를 향해 동쪽으로 달린다. 1시간 30분 정도면 페루자(Perugia)에 도착한다. 마을 아래 주차장은 꽤 넓고 여러 곳이 있는데도 이미 만차인 곳이 많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딜 가는 걸까 생각하며 주차장을 찾아 모르는 길을 헤맨다. 간신히 차를 세우고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중세의 공중도시를 향해 한없이 올라간다.
상행 에스컬레이터의 끝은 건물 사이의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이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 에스컬레이터를 못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곳곳에 이 공중도시로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들이 설치되어 있다. 내가 타고 온 그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내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셈이다.)
금세 가빠지는 숨을 몰아 쉬며 도시의 중앙을 향해 가파른 골목을 오른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눈이 부시도록 밝아진다. 광장에 도착한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중세 도시는 대성당과 그 앞의 광장을 중심으로 산책해 나가는 것으로 마을을 돌아보기 시작하는데 오늘은 농가민박에서 아침에 준 커피가 이태리가 아닌 미국 커피라고 오해할 만큼 묽었던지라(No offense) '(커)피가 모자라' 상태로 큰길에 도착하자마자 카페로 우선 돌진했다.
산드리(Pasticceria Sandri)는 1860년부터 디저트를 팔아온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한 카페이다. 일단 에스프레소와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커피를 마시며 그제야 조용히 카페 내부를 둘러본다. 진열장 자체도 낡았고 초콜릿과 케이크 자체의 세공미가 돋보이지는 않는다. (케이크 가게의 '다 먹어보고 싶지?'라는 주인의 자랑이 느껴지는 쇼케이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전통 디저트로 유명한 트라베세이루(Traveseiro)를 먹으면서도 느꼈었지만 보통 전통 디저트라는 것은 설탕이 귀하던 시기의 그 맛 그대로를 고수하여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에 극강의 단맛이 모든 것을 이기는 맛으로 설명되는 것 같다. 산드리의 초콜릿 케이크 역시 복합적인 맛이나 초콜릿의 쌉싸름한 맛은 찾아 느끼기 힘든 엄청난 단맛을 뽐내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바는 꽤나 격식이 갖춰져 있었고 오렌지즙을 짜는 기계도 있어 오렌지주스도 한잔 더 주문했다. 오랜만에 마시는 상큼한 오렌지주스를 음미하며 천장화를 감상했다. 천장화는 달기만 해서 아쉬운 케이크의 맛을 상쇄해 줄만큼 고풍스러운 카페의 분위기를 돋워주고 있었다.
햇살을 받으며 광장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따라 걷는다. 1층에 현대적인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중세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만큼 건축양식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건물 하나하나에서 오랜 세월이 느껴진다.
대성당을 둘러보고 나와 성당 계단에 앉아 마을의 큰길을 따라 늘어선 건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세월을 가득 보낸 건물인데 떼가 타지 않았다. 많이 닳거나 손상된 부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궁전의 아치 아래 부분에 있는 조각상들은 아주 말끔하고 마조레 분수의 부조된 조각상들도 형상이 온전하다. (건물 외벽에 머리가 온전히 붙어있는 조각상을 본 것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 큰 침입 없이 마을을 이루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일까? 텅 빈듯한 중앙거리를 바라보고 앉아 있으니 문득 주차장에 차를 댄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 간 것인지 궁금해진다. 모두 대학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봐도 말이 되질 않는다.
움브리아의 부엌이라 불리는 페루자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기 위해 소도시 여행 책자에서 추천해 준 보르고[Trattoria del Borgo]를 찾아갔다. 외진 골목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서 도착했지만 휴일도 아닌데 문은 굳게 닫혀있다. 이웃 주민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쌔만 으쓱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구글 지도 평점에 의존해 다른 레스토랑을 고른다.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Osteria a Priori]에 도착해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힐끔거려본다. 어두운 실내에 와인과 올리브 오일이 전시되어 있다. 식당 같아 보이지 않고 문도 닫힌 것 같다. 유리에 기대 눈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서 더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안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업 중인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돌아서려는 찰나 안에서 주인이 나온다. 유리 출입문이 옆으로 열린다. 입구는 작았는데 안으로는 한참을 들어갔다. 2층을 권해서 올라가니 꽤나 넓은 집이다.
커피를 마셨던 산드리에서도 그랬는데 이 마을의 가게들은 모두 작은 입구로 들어가 보면 '아, 이곳 생각보다 꽤 넓은걸'하고 생각하게 된다. 공중 도시의 마법처럼 보기보다 넓은 공간들이 이 도시 속에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식사를 할 충분한 공간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사람도 직관적으로 주문할 수 있도록 메뉴에 파스타의 종류와 그 속에 들어가는 재료가 일러스트로 그려져 있다. 움브리아 지방에서 유명한 트러플 파스타를 주문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생면 파스타는 원도 없이 먹는구나 싶어 흡족하다.)
포르치니 버섯과 올리브유에 버무려진 파스타 위에 트러플(송로버섯)이 가득 뿌려져 있다. 시각적으로도 너무 만족스러운 모습에 침이 고인다. 간혹 손톱만한 트러플이 들어있는 트러플 오일이나 병아리 모이만 한 크기의 트러플이 들어있는 트러플 소금을 먹어본 경험으로 트러플 맛이나 향을 잘 모르겠다거나 맛이 없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건 트러플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트러플 프렌치프라이를 먹으면서 대체 어떤 맛, 어떤 향이 트러플 향일까 궁금해하다가 내 미각과 후각이 예민하지 않아서 모르는구나 실망했었는데 가공된 제품이 아닌 생 트러플이 올라간 음식을 먹어보니 이건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향과 맛이었다.
배부른 점심식사를 하고 움브리아 대학 쪽으로도 걸어가 보고 싶지만 다음 도시가 나를 기다린다. 볼 것 먹을 것 천국인 이탈리아에서 하나의 도시를 하루 동안 보는 여유로움의 호사를 누릴 것인지 조금 부지런을 떨어 하루 2-3개 정도의 소도시의 분위기를 구경할 것인지는 언제나 어려운 선택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지 행복할 일이 많아 후회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