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들도 속속들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아직 나는 아말피 해안도로를 운전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관계로 짧은 시간에 가장 큰 효율을 뽑아주는 한국의 투어를 이용하기로 했다. 13년 전에는 투어 업체가 많지 않아서 선택권이랄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꽤 많은 한국현지 업체가 있어서 가격대별, 여행사별 특징에 따라 선택이 가능하다. 사실 폼페이를 거쳐 남부 해안을 맛보기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예전에 기차를 타고 가야 했던 것과 달리 전용버스로(그것도 우등좌석) 갈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해서 과거 우리 가족을 기차에 강제 낙오시킨 전적이 있는 [유로 자전거 나라]를 다시 선택했다. (다시 기차에 낙오될 일은 없을 테니.)
로마에서 폼페이에 가려면 나폴리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다시 사철 기차로 갈아타야 한다. 투어를 신청하게 되면 처음 모이는 장소까지 가는 법만 숙지하고 가이드를 만나는 순간 마음을 놓게 되는데 13년 전 우리가 만난 가이드는 (출근 첫날이었거나 여름 특수기간을 맞이해 채용한 아르바이트였을지도) 4인 가족을 기차에 태우고는 “나폴리 역에서 내리세요”라는 중요한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인원을 체크하기 위해 사라졌다. 내릴 때가 되면 가이드가 찾아와 하차 신호를 줄 것이라 믿었던 우리는 나폴리를 지난 열차가 하염없이 달리고 달려 이렇게 가다가는 이탈리아 지도상 구두의 콧등 부분까지 갈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 때쯤 우리만 낙오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렇게 국제미아가 되는 건가(사실 미아라고 하기에는 나이도 많았고 가족이 같이 있었다)'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동생은 영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이탈리아 할머니들과 역무원에게 상황을 반복 설명한 끝에 다른 칸에 있던 회사원 같은 분께 핸드폰을 빌려와 투어 업체에 전화를 했고 그때부터 할머니들과 역무원, 그리고 귀한 핸드폰을 빌려 준 감사한 회사원은 우리 이야기로 반상회를 벌이듯 토론회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리 전화를 받은 업체는 패닉 상태가 되었고 오히려 그렇게 전화 통화를 하고(감기를 누군가에게 옮기고 나면 멀쩡 해지는 것처럼) 당황스러움을 전염시키고 나니 우리의 마음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기차는 한참을 더 갔고 열차가 정차했을 때 우리는 할머니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하며 열차에서 내렸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여름휴가를 온 것처럼 놀았다. 백사장에 누워 쉬다가 바닷가가 보이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이 남부 바다에 언제 와보겠냐며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뛰어놀았다. 로마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해보니 내리쬐는 8월 한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그늘 하나 없는 폼페이 유적지를 강행군하는 것보다 훈장 같은 이야깃거리와 함께 이탈리아인처럼 여름휴가를 즐긴 것이 더 좋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로마에 도착하니 우리의 멘탈붕괴에 완전히 전염된 여행사 현지 사장님과 다른 직원분이 나와있었고 아버지와 그분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동생과 나는 바닷가의 여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다음날 바티칸 투어를 같이 사과하러 역에 나왔던 여자 가이드 분 팀에서 하게 되었는데 내 20살 인생 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미켈란젤로와 그의 작품 '피에타'와의 만남에 너무 좋은 역할을 해주셨다. 뒤늦게 알게 된 이야기로는 그 가이드 분이 그 업체에서 전설(?)로 남은 입지적 인물이시라고.)
여하튼, 그렇게 우리 가족과 사연 가득한 곳이 13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열심히 투어를 진행해서 전용버스를 사 남부 투어를 진행한다고 하니 낙오의 트라우마는 접어두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