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밥그릇의 재구성: 배고픔에 대하여

by 무늬

얼마 전 퇴사를 하고 본격적인 1인 자영업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홀로서기를 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생의 불안. 불안을 타파하는 최고의 방법은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벼랑 끝을 가정하고 그로부터 벌어야 할 최소한의 돈을 역산한다. 포기할 수 있는 선택지를 하나, 둘 지우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밥이다. 커피도, 집도, 책도 아닌 밥. 그렇다. 굶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모든 계산과 근심, 걱정, 불안은 입으로 수렴한다. 자아실현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 다른 ‘구강기’를 지나야 한다.

인간의 연비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못해도 하루 두 끼는 굶기지 않고 먹여야 생산을 위한 노동이 가능하다. 이상을 실현하는 수많은 과정이 고작 먹고, 자고 싸는 일 앞에서 무너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산다는 게 지독해진다. 한 사람 해 먹이려고 재료를 다듬고 끓이는 일이 너무나도 무겁게, 권태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 내가 채워지지 않는 식탐으로 씨름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런 생각의 변화는 오히려 해방에 가깝다.


빼앗긴 밥 반 그릇의 나비효과

엄마는 언제나 밥그릇의 반을 넘겨 담아주는 법이 없었다. 살이 찔까봐 밥을 한번 푸면 꼭 주걱으로 덜어내곤 했다. 딱 덜어낸 그 밥만큼 허기가 졌던 시절. 누가 허락해줘야만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은 스스로에 대한 통제로 이어졌다.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 일을 시작한 엄마가 더 이상 밥을 퍼줄 수 없게 된 뒤에도 나는 정직하게 반 그릇을 지켜 먹었다. 그리고 나서 몰래 다른 걸 폭식했다.

식사량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요리가 서툴다 보니 1인분만 만드는 게 잘 안됐고, 마침 곁에는 남는 걸 같이 먹어줄 사람이 있었다. 못 먹어서 불행했다 생각했고, 많이 먹고 잘 먹으면 성공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오늘 먹고 내일 죽을 사람처럼 음식에 천착했다. 호텔 조식도 배가 터지도록 먹어보고, 한 끼에 30만 원 하는 오마카세도 가책 없이 사 먹었다.

약과 폭식의 부작용으로 20킬로그램이 찌고 나서야 알게 됐다. 많이 먹었을 뿐, 잘 먹으며 살진 못했다는 걸. 나는 너무 많이 먹은 죄로 시도 때도 없이 염증이 차오르는 병을 얻었다. 평범한 식사 한 끼에도 배가 너무 아파서, 다시 밥그릇의 밥을 덜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먹을 수 없어 요리도 배우고, 재료도 공부했다. 엄마가 내게 해줄 수 없었던 반찬을 내가 나에게 직접 해주었다.


반 그릇, 주먹 두 개 크기를 채우는 데 적합한 밥의 양

간단하게 만든 나물 몇 가지에 밥 반 그릇. 풍선같던 몸에서 바람이 빠지고 배가 아프지 않게 된 건 이 식단을 찾았을 때였다. 그거면 몸이 아프지도 않고 딱 좋았다. 비로소 탈 없이, '잘' 먹게 된 거다. 애초에 고작 반 그릇이면 족했다는 깨달음이 허탈감과 함께 몰려왔다. 더 많이 먹어봤자 체할 뿐이라는 간단한 사실을, 수많은 소화제와 소염제를 삼킨 뒤에야 알게 된 것이다.

대체 그간 나를 옥죄었던 나머지 반 그릇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감로탱화에 등장하는 아귀 그림이 떠올랐다. 실처럼 가는 목에 큰 배를 가진 굶주림과 욕망의 귀신. 한번에 삼킬 수 있는 음식의 양이 너무 적어서 끝없는 배고픔에 시달리는 존재. 인간의 위는 자신의 주먹 두 개만 한 크기라고 하는데. 내 욕망의 크기는 아귀의 것만큼 컸던 것일까.

애초에 내 밥은 누가 빼앗은 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항상 반 그릇을 덜어가던 엄마를, 치킨 한 마리에 애걸복걸 해야 했던 가난을 더 이상 마음 놓고 미워할 자신이 없어져서. 그냥,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없어져 버려서. 온갖 산해진미를 가져와도 인간인 내가 한번에 채울 수 있는 건 고작 주먹 두 개 크기의 허기가 전부였다.


잘 먹는 사람(삶)이고 싶다, 가늘고 길게

‘많이 먹어.’ 이 얼마나, 삶의 아주 짧은 시절에만 축복일 수 있는 문장인지. 나는 이제 많이 먹기 보다는 더 잘 먹는 사람이고 싶다. 가리고 가려서, 소화할 수 있는 소박한 것들로, 가늘고 길게. 물론 당연히 가끔은 스테이크도 썰고, 호텔 조식도 먹으러 갈 거다. 하지만 전처럼 많이, 자주 먹진 못할 것 같다. 그럴 수 있는 돈과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나를 위해 책임져야 하는 식비가 그렇게 비싸지만은 않은 셈이다. 안도감과 함께 머쓱한 자신감이 생긴다. 몇 단의 나물과 양념, 약간의 단백질 그리고 껍질이 덜 벗겨진 쌀을 사는데 드는 딱 그 만큼의 돈. 그 정도야 뭐, 벌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내게 밥 반 그릇을 채워줄 수 있는 정도의 삶. 그 정도는 충분히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닦아 놓은 밥그릇을 꺼내 본다. 그러니까, 너의 용량은 고봉밥이 아니라 반 그릇이라는 거지. 그나마도 채우려니 귀찮은 건 어쩔 수 없지만, 주어진 몫을 먹어야 다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버무려둔 나물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내일은 장을 보러 가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라디오의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