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군대와 무관했던 한 엄마의 용기
진료실에서 정말 특별한 환자를 만났다. 나는 예방접종실에 근무한다. 환자가 오면 먼저 차트를 펼쳐보고, 어떤 주사가 필요한지 확인한 뒤 준비하는 것이 일상이다. 늘 반복되는 절차지만, 이 환자의 차트는 조금 달랐다. 차트에 적힌 정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세 가지 모습을 떠올렸다.
첫째, 이름을 보니 한국인 이민자 여성일 것 같았다.
둘째, 계급을 보니 이제 막 입대한 신병일 듯했다.
셋째, 나이가 마흔을 넘겼으니, 군복을 입고 들어올 때 자연스레 떠오를 이미지가 있었다.
나는 환자가 어떤 모습일지 마음속에서 이미 결론을 내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마주한 순간, 모든 예상은 단숨에 무너졌다. 군복을 입지 않고, 어린아이와 함께 들어온 그녀의 첫인상은 여리여리한 아이 엄마였다.
“어머니, 군인이신가요?”
“네. 맞아요.”
그녀는 대학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남편을 만났다. 결혼 후 20년 가까이 가정주부로 지내며, 군대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쭉 미국에서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인가 보다. 시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병이 진행되자 자주 넘어지셨고, 병원에 갈 일도 부쩍 늘어났다.
늘어나는 병원비 앞에서 남편의 외벌이만으로는 버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인터넷을 뒤지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미군 모집 공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주변에 군인도 없었고 군 생활에 대해서 아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낸 단 하나의 이유는 ‘남편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군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7개월. 다행히 첫 배치는 한국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지만,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말에는 단단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뒤에 대기 중인 환자들이 많아 오래 대화를 이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짧은 만남이 남긴 여운은 꽤 오래갔다.
군 생활이 한국보다 나을 수는 있겠지만, 첫 사회생활이 군대라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오랜 시간 가정주부로 지내다 군인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남편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원입대를 결심한 그 환자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는 걸까? 자신을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계기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숨겨진 힘과 용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