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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부대에도 "김부장"이 있을까?

내가 만난 김부장

by 희원다움

요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 특히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어딘가 짠하고 어설퍼 보이는 ‘꼰대’ 캐릭터의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불안, 압력, 그리고 조직이 만들어낸 위계의 현실을 정확하게 건드린다.


한국 기업 문화는 여전히 연공서열과 직급 중심 구조가 강하게 남아 있다. 나이와 직급이 실력보다 앞서고, 윗선의 평가가 커리어를 결정짓는 관행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40~50대 중년층은 한때 성공한 중산층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대기업 + 서울 자가 + 안정된 가정’이라는 조합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직장에서의 승진, 노후 대비, 가족과 자녀 교육까지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은 직장인이 김부장과 같은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속 김낙수 부장은 단순한 한 명의 캐릭터가 아니라 수많은 직장인들의 축적된 피로와 불안을 대변하는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김부장은 우리 나라에만 있을까?


나는 미국에서 일반 기업에 다닌 경험은 없지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하나는 확실히 느꼈다. 이곳에도 수많은 김부장이 존재한다.


겉으로 보면 미국의 조직은 자유롭고 상사 눈치를 덜 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군부대는 엄연히 계급과 명령 체계가 존재하는 군대다. 계급은 절대적이고, 위계질서는 명확하며, 상부의 지시에는 철저히 따라야 한다. 속된 표현으로 ‘까라면 까'야 한다.


피라미드식 구조에서 상위 단계로 올라가는 승진 경쟁은 늘 치열하다. 미군부대 역시, 승진을 위해서는 ‘어떤 성과를 만들어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일의 본질이나 과정보다 숫자로 증명되는 결과가 곧 능력을 의미한다.


예전 내 상사도 김부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팀보다 자신의 커리어에 더 집중하는 편이었고, 윗선에서 내려오는 일에는 망설임 없이 “Yes”라고 답하곤 했다. 그런 태도가 평가에 영향을 줬는지, 그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승진해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군대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승진을 위해 그렇게 자신을 갈아 넣던 사람이 왜?’ 이유가 궁금하던 차에 그는 주사를 맞으러 내가 있는 예방접종실에 왔다. 양쪽 눈이 충혈된 채 걸어오면서도 손에서 노트북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바빠 죽겠어요.”

“마이클은 잘 커요? 4살 됐죠? 4살, 접종은 맞췄어요?”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몰라요. 난 너무 바빠요. 지금도 주사 맞고 바로 인천공항 가야 해요.”


“오, 드디어 휴가가세요?”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출장가요....”


주사를 맞는 순간에도 노트북을 두드리던 그의 모습을 보며 문득 드라마 속 김부장이 떠올랐다. 가족들과 여행 한 번 갈 여유도 없었고, 하나뿐인 아들의 졸업식조차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사람. 회사만 바라보며 달려온 김부장은 퇴사 후에서야 비로소 자신에게 물었다.


‘김부장, 너는 왜 임원이 되고 싶었냐?’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주사를 맞는 그 5초마저 자신에게 허락하지 못할 만큼 바쁜가요?’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건강 잘 챙기고, 출장 무사히 다녀오세요.”


드라마 속 김낙수는 자존심과 사회적 위치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왔다. 그러다 상가 사기로 퇴직금까지 잃는 일이 벌어지면서 자존심 하나에 매달려 살아온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공해 보이고 싶었던 체면과 불안의 무게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무게가 오히려 자신의 일상과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왔다는 점을. 김낙수는 김부장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이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김부장이 될 수 있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도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만들어보자.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솔직해지는 순간, 나도, 당신도, 그리고 나의 옛 상사도 김부장이 아니라 김낙수처럼 조금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자, 모든 김낙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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