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경의 책씻이]서정적이어서 더 아픈, 한강 소설집 <여수의 사랑>
지난해 12월 10일(스웨덴 현지 시각) 소설가 한강은 제124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스웨덴 국왕 칼 쿠스타프 16세로부터 노벨문학상 증서와 알프레드 노벨이 새겨진 메달을 받았다. 그보다 일찍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10월부터 나는 그녀의 작품들을 모두 찾아 읽으려 살고 있는 구의 관할 도서관 11곳을 검색했는데, 놀랍게도 대출에 실패했다. 도서관마다 한강의 전 작품은 대출 중이었고, 예약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번 주에야 그녀의 등단작 『붉은 닻』(1994)이 실린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대출할 수 있었다. 함께 엮인 『여수의 사랑』(1994), 『질주』(1994), 『어둠의 사육제』(1995), 『야간열차』(1994), 『진달래 능선』(1994) 등 다섯 작품은 『붉은 닻』과 동시대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저 여섯 작품의 한결같음은 주인공 청년의 내밀한 과거 상처가 그의 삶을 치명적으로 저미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홀로 끙끙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인공을 닮은 인물이 작품마다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 『질주』의 인규와 진규,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명환, 『야간열차』의 영현과 동걸,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씨, 『붉은 닻』의 동식과 동영 등이 그렇다. 주인공이 자신과 닮은꼴인 타자의 통증을 응시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서사에서 병든 타자는 자아의 거울이다. 소설가 한강은 너와 나를 동시에 불러내어 우리의 병든 세계를 연출한 것이다.
혼자 앓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상 집단적으로 앓고 있음을 암시하는 《여수의 사랑》의 병증들은 부실하거나 불우한 아버지와 가장에서 비롯된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떠올리면, 아버지와 가장의 상징적인 역할이 부재하는, 소위 가치가 전도된 90년대의 사회적 혼란과 불안이 문학적 변주를 통해 개개인의 내밀한 상실통으로 전환된 셈이다. 그 서사가 『여수의 사랑』의 정선처럼,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처럼 실컷 앓은 후 자생력을 틔우고 있어 다행이다.
내가 읽어낸 그 지난한 낙관은 당대의 아픈 영혼들이 소설가 한강에게 빙의한 듯한 문체로써 일구어지고 있다. 그 문체는 비유가 풍부한 시적 서정성으로 들어차 있어 독자에게 등장인물들의 농밀한 아픔과 우울을 되쏘듯 전달한다. 그 탓에 나는 작품 하나하나를 마칠 때마다 ‘번아웃 증후군’에 걸린 듯 온몸의 맥이 풀리곤 했다. 그 문체가 안기는 슬픈 아름다움에 매혹된 상태여서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모든 창에 불이 꺼질 때 야간열차는 떠난다. 머리를 푼 혼령 같은 어둠이 검은 산을 적시고 검은 강물에 섞이다가 아득한 지반(地盤) 아래로 가라앉을 때, 야간열차는 오래 참아왔던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간다. 수많은 눈[眼] 같은 차창들이 번쩍인다. 식어가던 선로에 불꽃이 튄다. 제 정수리로 어둠을 짓부수며 야간열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새벽을 향해 미끄러져간다.”(『야간열차』, 149)
아프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될 수도 있다. 낫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무엇엔가에게 비는 마음으로. 그러나 《여수의 사랑》의 주인공들은 통증에 굴복하지 않는다. 아픔을 핑계로 제 할 일을 마다하거나, 누군가를 몰아세우거나 하지 않으면서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건강한 자아를 상실한 곳(것)을 찾아 나선다. 병든 세계에서 치명상을 딛고 새살을 돋아내는 그 여수(旅愁)의 통과의례가 아름답다. 바람직한 인간상을 빚었기에 더더욱.
[참고] 《여수의 사랑》의 여수는 전남 여수시의 여수(麗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