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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Park Apr 10. 2021

존 르 카레

지난 토요일에 소설가 존 르 카레가 사망했다. '사망'이란 단어가 어색하면서도 다른 단어보다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인 것 같다. 간단. 명료. 

가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구체적인 누구.. 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 펴보는 책들이 있다. 읽고 있으면 친구나 선배, 가까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읽어주는 사람은 없는데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전달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이 사람처럼. 그의 책처럼.

감상을 떨지 않는 건조하고 단정한 문장들인데 왜 그랬을까.

책 속에 죽다 살아난 스파이가 영국의 시골학교에서 임시 프랑스어 선생으로 숨어 지내는 부분이 있었다. 회복 중이었던 스파이는 학교 근처 트레일러에서 살아간다. 학생과 선생들 대부분은 이 남자가 좀 괴상한 외톨이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뚱뚱하고 안경 낀 소년만이, 그렇게 성적이 뛰어나지도 머리가 좋지도 않지만 관찰력만은 나쁘지 않은 아이가 이 사람에게 빨려 들 듯한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주변을 맴돈다. 심부름도 하고 비웃음 사기도 하지만 아이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좋다.. 고 생각한다. 가끔은 그렇게 아이다운 아이도 있는 법이니까.

어릴 때 나는 전혀 아이다운 아이가 아니라 뾰족하고 음침한 꼬마였는데 이상하게 그 책을 읽으면 그 아이, 빌 로치가 되곤 했다. 괴팍하지만 다방면에 유능한  (교실로 침입한 올빼미의 목을 꺾어버린다던가) 프랑스어 선생님에게 다가가 뿌연 안경을 볼록한 배에 붙은 티셔츠에 문질러 닦으며 다음 심부름을 시켜줬으면, 친절하진 않더라도 자꾸 내게 말을 걸어주었으면 싶었다. (새로 온 뉴 보이라고? 난 말이야, 올드 보이지. 립 밴 윙클처럼 오래된 올드 보이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프랑스어 선생님이 아닌데 (심지어 때가 되자 학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휘리릭 가버릴 뿐인데도) 나도 열서너 살의  멍한 표정의 소년이 아닌데 자꾸 그런 생각을 했다. 만일 나라면 커서  팅커(땜장이), 테일러(재단사), 솔저(군인)가 아니라 스파이가 되고 싶었을 것 같았다.

잘 가요. (정체불명의) 프랑스 어 선생님.

다음에도 다시 그 목소리로 만날 수 있길.

소리 내지 않아도 여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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