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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Aug 04. 2019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여행 소회 (24) - 영국 런던 07




공간마다 각자의 영혼이 있지


나 혼자만의 주장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는 없어도 나는 장소마다 자리 잡은 분위기가 각자 다른 호흡으로 숨 쉬고 있다고 믿는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도 공포물 한 장면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내가 굳이 신묘한 영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공간의 역사와,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만들어간 묘한 에너지가 각기 공간의 공기(atmosphere)를 만들어 간다고 믿는다. 승부차기 순간에 상암의 터질 듯한 열기, 노량진의 우울감이 깃든 긴장감, 방학을 맞은 홍대의 금요일 밤. 몇 가지 예시에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부인할 수 없는 공간의 에너지는 분명히 살아 있다.


열흘 정도 머문 런던은 곧 크리스마스를 앞둬 들떠 있었다. 한창 프리미어리그 시즌이기도 했고, 옥스퍼드 거리는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으로 장식됐으며, 역사가 깊은 마켓마다 붐비는 현지인들과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반면 영국의 초고층 빌딩인 더 샤드가 한눈에 보일만큼 런던 중심가에 자리한 런던탑은 노골적으로 처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투명하게 내리쬐는 밝은 햇살이 너무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키우는 듯한 거대한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하고 탑 주변을 서성거렸다.



사실 런던탑은 권력을 상징하는 요새로 건설됐지만, 왕권 다툼에서 패배한 세 명의 왕족이 처형당하고 가톨릭 신자와 신교도들이 투옥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인식됐다. 런던탑 곳곳의 체험관과 전시실 대부분은 이러한 과거 배경에 기반을 둔 터라 성 곳곳을 방문하는 우리 역시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긴장감과 내내 동행한 채였다.



베일 듯이 아픈 여정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뜻밖의 장소와 마주쳤다. 과거 신도들의 예배당이었다. 창문 사이사이로 다정하게 스며드는 햇살의 온기에 긴장했던 몸이 조금 안도했다. 나는 이 공간이 가진 치유의 에너지를 살짝 붙들고 자리에 앉아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어디선가 성가대의 송가가 들려왔다.



무언가 가벼운 날갯짓으로 어깨를 감싸 안아 준 것 같았다. 뜻밖의 경건함에 울컥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혹시 신이 계시나?

나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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