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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도영 Aug 18. 2019

물방울이 실린 바람이 그랬다

여행 소회 (25) - 대한민국 제주 05



작은 시골 마을은 물기를 머금은 하얀 꽃처럼 맑고 소박했다. 들꽃의 있는 듯 없는 듯한 맑은 물 냄새가 어딜 가나 공기와 함께 였다. 옹기종기 잘 짜인 돌담길에 바다와 잘 어울리는 하얀 집이 모여 있었다. 걷기에 좋은 골목이고 날씨였다.



다들 일손이 바빠 나가셨는지 골목에는 인적이 없이 조용했다. 자칫 폐가 될까 싶어 조근조근 떠드는 우리의 말소리가 짙은 돌담을 타고 넘어갔다. 집집마다 고운 바다색을 닮은 지붕을 쓰고 있어 참 제주다웠다. 회색빛 시멘트가 그대로 보이는 작은 공장은 덩굴로 화사하게 옷을 입고 있어 되려 싱그러웠다.



골목을 누비다 옛집을 개조한 카페에 다다랐다. 마을의 크기에 비해 규모가 큰 카페에는 내 또래의 사람이 많았는데, 제주에 오래 머무는 듯 여유가 넘치면서도 다들 외지인의 냄새를 풍겼다.



우리는 시럽 뺀 당근 주스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딛고 올라서자 가로로 길게 난 창이 예쁜, 작은 공간이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제주의 뒷마당이 창문 가득 담겨 있어 신이 났다.



곧이어 고운 주홍빛의 주스를 마주하자 향긋한 당근 향에 입가가 실룩거렸다. 점심 식사를 충분히 하고 난 다음이었는데도 시원하게 한 모금 한 모금 넘길 때마다 줄어드는 양이 아쉬웠다. 서울에서 우리는 가끔 이 날의 당근 주스로 수다를 떨었는데, 기꺼이 생각하고 곱씹어도 아깝지 않을 맛이었다.



카페를 떠나기 전 나는 탐이 나던 1층의 테라스 자리에 앉아 시원하게 불어오는 제주의 바람을 맞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순간이 가끔 생각나겠지. 싶은 때가 있다. 당근주스가 그랬고, 물방울을 실은 그 날의 바람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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